그 날은, 벤치에서 단 한 번도 일어날 수 없었던 그런 평범한 날이었다.


 훈련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연습 경기에서 잘했다며 칭찬을 받아도 의미없었다.


 당시의 나는 아직 신인, 유망주였다. 경기를 뛰어야 성장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실전에 내보내기엔 애매한.


 그런 데다가 구단은 이번엔 반드시 우승하겠다며 칼을 갈고 있었으니 웬만해선 다 이긴 경기도 방심하지 않고 주전들을 교체하지 않았다.


 그러니 정말 경기 상황이 안 좋아서, 어차피 진 경기인데 신인들 기회나 줄까, 덕아웃에서 그렇게 결정을 내려야 실전에 설 수 있는 그런 신세였다.



 그 밤은, 공원 벤치에 혼자 앉아서 찬 바람을 맞으며 이게, 내가 하고 있는 그 모든 노력이 과연 의미가 있긴 한가 자문하던 그런 평범한 밤이었다.


 그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단 한 번, 네가 원한다면 반드시 홈런을 치게 해줄게. 대신 네 영혼은 내 것이 될 거야."



 나는 깜짝 놀라 황급히 주변을 둘러봤었다. 하지만 아무도 찾을 수 없었고, 그럼에도 은근한 목소리는 계속 귓가를 간질였다.



 "내 힘이 필요한 순간이 오면 마음 속으로 나를 불러. 언제든 찾아갈 테니까."



 돌이켜 보면, 당시의 나는 심적으로 굉장히 몰려있었던 모양이다. 환청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의심하지도 않고 곧바로 질문을 했으니.



 "이름, 이름이 뭡니까."


 "아… 그렇지. 소개가 늦었네. 나는 야구의 악마, 이름은 없어. 아직 이름이 생길 정도로 오래된 악마는 아니거든…."



 또 생각해 보면, 악마의 목소리는 굉장히 달짝지근했던 것 같다. 회상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가슴이 설렐 정도로.


 당시엔 동아줄이 내려왔으니 이게 진짜인지 아닌지, 목소리가 어떤지 전혀 신경쓰지 않았지만.



 "그러니까, 꼭 나를 불러줘. 내가 더 오래 살 수 있게, 언젠간 이름을 얻을 수 있게."


 

 그 순간은, 무명의 야구선수가 악마와 계약한 아주 특별한 순간이었다.




 ---




 기회가 왔다.


 항상 팽팽한 접전을 펼치느라 신인들에게 기회가 오지 않던 상황.


 바로 전 경기에서 1위 팀과 11회까지 가는 연장 승부에 주전들의 피로도가 극심한 상황에서 하필이면 뒤를 바짝 추격하는 3위 팀과의 경기가 이어졌다.


 주전을 뺄 수는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경기를 강행했지만, 눈에 보일 정도로 뛰는 게 느려진 선수가 결국엔 내려오게 됐다.


 대주자가 필요한 상황, 예비 중에서 가장 발이 빨랐던 덕에 무난하게 출전했고….



 그 뒤로 순서가 돌아 타석에 올라섰을 때는 기습번트 성공으로 진루, 수비 중엔 아슬아슬하게 담장을 노리던 공을 몸을 던져 잡아냈다. 송구도 그 어느 때보다 빠르고 깔끔해서, 당시 해설이 극찬하며 저 선수는 왜 투수를 안 하고 타자를 하고 있냐고 그런 이야기도 나왔었다. 뒤늦게 보고 부끄러워 죽는 줄 알았었지.


 한껏 활약하고, 덕아웃으로 돌아가서 감독님, 코치님들, 선배님들에게 격한 환영을, 대기 중이던 동기들에겐 선망과 질시가 동시에 어린 시선을 받고….



 당시의 내가 왜 그렇게 활약했는가. 이전에 대타로 나섰을 때는 죽을 쒔는데, 왜 그 날은 달랐나.


 그때의 나는 그냥 훈련의 성과가 이제 나타났구나, 그렇게만 여겼다.


 이젠 안다. 그건, 악마와의 계약 덕이라고. 그게 중요한 순간엔 반드시 활약할 수 있다는 안도감 덕분에, 긴장 하나 없이 내 실력을 다 끌어낼 수 있었던 거였다고.




 그리고 마지막 타석. 9회 말 1아웃, 스코어는 8 대 8. 주자는 1, 3루.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나중에 영혼을 악마에게 뺏긴다 해도 괜찮았다.


 그러니, 망설임 없이 마음속으로 야구의 악마를 불렀다.



 그 순간, 시간이 한없이 늘어지며 달짝지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음, 나도 보고 있긴 했는데… 여기서 쓰긴 좀 아깝지 않겠어? 오늘 느낌 좋잖아. 어차피 감독 눈도장은 확실히 찍은 거 같고, 실패해도 그냥 좀 아쉬운 거니까… 응, 그냥 이대로 가보자."



 당시의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다, 고작 대주자로 나왔을 뿐인데, 이런 자리에서 기회를 소모하기는 아깝다… 그런 생각이었다.



 그 날은 확실히 느낌이 좋았다.


 끝내기 안타, 스코어는 9 대 8. 악마와의 계약은 끝나지 않았다.




 ---




 그 이후로도 수 차례 악마를 불러냈다.


 하지만 대답은 같았다.


 한 번밖에 못 쓰는데 여기서 쓰긴 아깝지 않겠느냐, 노린다면 역시 최고의 자리, 예를 들면 한국시리즈에서 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 이왕이면 역전만루홈런이 최고지 않겠느냐….


 역시 악마라는 걸까, 사람의 마음이 어디에 흔들리는지 잘 알았다. 한국시리즈, 역전만루홈런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크게 뛰었다. 그런 탓에 이번에야말로 영혼을 바치겠다고 결심한 게 무색하게 매번 수긍하고 묵묵히 배트를 휘둘렀다.


 또한 최고의 자리에 서기 위해서는 단 한 번의 요행에 기대는 게으른 선수여서는 안 됐으므로, 필연적으로 나는 더욱 노력해야만 했다.


 그렇게 꽤 괜찮은 신인에서, 팀에 없어서는 안 될 주전 선수로 자리잡을 때까지도 나는 계약을 끝내지 못했다.



 그리고 드디어, 팀이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했다.


 그동안 악재가 겹쳐 몇 번이고 미끄러지고 또 미끄러졌던 팀으로서는 절대 놓칠 수 없는 기회.


 몇몇 선배들, 그리고 감독님으로서도 마지막 시즌이었다.


 그러니, 모두가 그랬다. 악착같이 치고, 달리고, 잡고.



 그 끝에….


 한국시리즈 7차전, 9회말 2아웃, 스코어는 7 대 10… 만루.


 내가 타석에 들어섰다.


 망설임 없이 악마를 불렀다.



 "그게, 네 선택이야?"



 시간을 한없이 늘이며 나타난, 여전히 모습은 보이지 않는 악마가 흐음, 하고 말을 늘였다.



 "이미 넌 충분히 성공했잖아? 그래서 난 안 부를 줄 알았는데. 정말 한순간의 영광을 위해서 악마에게 영혼을 뺏기는 게 네 선택이야?"



 그 말이 맞았다. 이미 충분히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야구선수였다.


 여기서 죽어도 좋다.


 야구선수로서, 이런 최고의 자리에서 최고의 모습을 보여줄 수만 있다면.


 모두의 노력에 보답할 수 있다면, 모두의 응원과 기대에 보답할 수 있다면.



 그러니 마음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야구선수라, 그럼 더욱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상대 팀은 뭐 놀아서 여기 있나? 그들의 노력을 이렇게 짓밟아도 되는 거야?"



 스스로도 어이가 없는지 악마가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최고의 자리를 노리라고 한 것도 자신이었고, 불합리한 확정 홈런을 미끼로 계약한 것도 자신이었으니.



 "하아… 그래, 뭐. 그게 네 선택이라면."



 그리고, 시간은 다시 정상적으로 흘러갔다.


 악마가 왜 이렇게 나를 말리는 건지 궁금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투수가 공을 던졌으니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투수가 던진 공이 어디로 올지, 저걸 쳐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게, 악마의 힘이구나.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나는 만루홈런을 쳤고, 마지막을 각오했던 게 무색하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동료들에게 헹가래를 받으며, 뒤늦게서야 내가 스스로의 힘으로 홈런을 쳤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리 마음속으로 악마를 불러도 악마가 찾아오지 않음을 깨달았고, 애초에 악마가 자신과 대화를 했을 뿐 정식으로 계약한 적이 없음도 깨달았다.


 또한 악마와의 대화가 얼마나 정신적으로 지지가 됐는지, 늘 자신이라면 최고의 자리에 설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한 듯한 그 말들이 얼마나 가슴을 설레게 했고, 그리 하여 자신이 그 달콤한 목소리의 주인에게 어떤 마음을 품게 됐는지도 깨달았다.



 가을이었다.




 ---




 "히야… 설마 설마 했는데 진짜 치네."



 야구의 악마가 야구장 상공을 둥실 떠다니며 실소를 흘렸다. 그 웃음은 곧 흐물흐물하게 풀어졌다.



 "아, 이 질척이는 감정… 너무 좋아…."



 역전만루홈런, 승리팀과 그 팬들에겐 더없이 기쁜 일이지만, 패배팀에게도 그럴 순 없었다.


 누군가 이기면 누군간 져야 한다. 그것이 승부, 그것이 스포츠. 그리고 현대의 악마들이 힘을 얻는 원천.



 애초에 그녀는 홈런을 치게 해 줄 생각이 없었다. 그저 제안을 받은 선수가 중요한 순간에 자신을 부르고, 당연히 계약이 이뤄질 것이라 생각한 순간.


 배트가 허망하게 허공을 가르고, 감독의 혀 차는 소리가, 동료들의 나지막한 비웃음이, 성난 관중들의 욕설이 은은하게 귓가를 스치는. 그 순간의 절망감을 음미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몇 번이고 해온 일이고, 그래서 이번에도 똑같이 대응했다.


 그것이 설마 여기까지 오게 될 줄은 그녀 자신도 몰랐지만.


 그 탓에 심경이 조금 복잡했는데, 선수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에게 영혼을 바치겠다기에 자신도 모르게 만류하기도 했다. 순간 설정에 잡아먹혀 정말 계약을 맺고 영혼을 바치는 상황으로 착각한 것이다.


 스스로를 냉철한 악마라고 자부하는 그녀로서는 조금 부끄러운 일이었다.



 여하튼 간에 그녀는 기분이 좋았다. 평범한 감정들만을 맛보다가 뜻밖에도 이토록 극적인 상황에서 나온 절망, 좌절, 공포, 후회, 책임, 분노, 회한, 슬픔… 그런 극상의 감정을 먹게 되었으니.


 그럼에도 마음 한켠이 조금 쓸쓸한 것은, 한동안 시즌이 없어 감정을 수급하려면 다른 악마들의 양해를 구해야 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왜 쓸쓸한 것인지 알고 있었다. 해소할 방법이 뭔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감정을 애써 억눌렀다.


 계약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미 유혹에 한 번 넘어간 인간이다. 신의 눈총을 사고 있는 인간이다. 정말 다시 만난다면, 계약을 맺는다면, 영혼이 그녀의 영혼에 묶인다면. 그럼 악마의 유혹에 넘어간 죄로 영겁토록 극심한 고통을 느끼게 된다. 그런 것은, 그 누구보다 노력해온 인간에게 할 짓이 못 되니까.


 마음에 들어버린 인간을 그런 고통을 겪게 하면서까지 자신 곁에 두는 건, 그런 짓을 하는 건 정말 끔찍하게도 이기적이고, 그래. 정말 악마적인 일이니까. 악마인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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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 반드시 홈런을 칠 수 있는 능력

근데 그걸 최대한 잘 활용하려면 최대한 큰 경기에서, 최대한 중요한 국면이어야 함

그러려면 경기에 출전해야 하고, 그러려면 평소에 훈련을 열심히 했어야 하고...


이런 식으로 뭔가 능력은 능력인데 제대로 쓰려면 결국 기본에 충실해야 하는 건 어떨까 생각했음

근데 그럼 재미가 없겠다 싶었는데 뭔가 오늘은 써보고 싶은 느낌이라 써봤음



악마가 능력 주는데 사실 낚시라 선수 스스로의 힘으로 역전만루홈런친다!!!


이게 원래 구상이었고 다른 내용은 있긴 했던 거 같은데 오래 전이라 기억 안 나서 써지는대로 써봤음

근데 쓰다 보니까 뭔가 둘 다 서로한테 반해버렸네


거 뭐시냐

나중에 선수가 어찌저찌 악마 찾고

둘이 어찌저찌 옥신각신하다 결국 계약해서 선수 영혼 악마한테 묶이고

본래는 영원히 고통받아야 하는데 신이 순애단이라서 대충 봐줬다고 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