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에게 쓰러진 용사 일행의 뒤에서, 짐꾼은 황망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용사의 패배 때문에 미쳐버린 것 같기도 했다. 아니, 미쳐버렸다.


인류 구원의 희망이 산산히 조각났으니 미쳐버릴 수밖에 없기는 했다. 용사는 마왕에게 패배했고, 이제 마왕은 세계를 폭력으로 지배할 것이었다.


그러나 짐꾼이 미쳐버린 이유는 그런 단순한 '절망' 때문은 아니었다.



"원작보다 더 빠르게 강해질 수 있도록 기연이 있는 던전으로 인도해줬고, 각각의 능력에 어울리는 스승도 구해줬고, 종결급 무기랑 영약까지 구해줬는데 왜 더 약해진 거지?"



짐꾼은 빙의자였다.


본래 이 세계가 '용사' 일행에 의해 구원받는다는 것을 알고있었기 때문에, 최대한 원작의 스토리라인을 따라가며 용사 일행을 조력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노력은 분명 보답받아야했을 터였다.


이 세계의 '미래'를 알고있는 빙의자가 만들어낸 최선의 성장곡선을 따라 성장한 용사 파티가, 본디 여러 실수를 거듭하면서도 끝내 마왕에게 승리하였을 용사가, 마왕에게 패배하는 일이 일어날 리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실패했다.


그 사실이 짐꾼을 미치게 만들었다. 도저히 이 처참한 실패의 원흉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원작에 비해 모자랐던 점이라고 한다면, 기껏해봐야....



"...설마, 내가 용사를 너무 도와준 게 문제였나?"



원작에서는 용사가 각성하는 계기가 되었을 짐꾼의 배신이, 이 세계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본래라면 짐꾼의 배신으로 용사는 위기에 빠지고, 그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한층 정신적으로 성숙해진다.


하지만 위기가 너무 없던 탓에, 도리어 용사가 약해졌다면? 위기 속에서 성장해야할 용사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다면?


그렇다면....



[당신은 죽었습니다.]

[당신은 실패했습니다. 세계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세계는 마왕의 손아귀에 떨어졌습니다.]

[빙의 시점으로 회귀합니다.]



"...단순한 스펙업만으로는 세계를 구할 수 없다는 건가."



생각해보면, 간단한 이야기였다.


영웅에게는 아치에너미가 필요하다. 세계를 지배하려는 마왕 따위 너무 추상적이고 신화적인 목표가 아닌가.


그러니 주인공(Hero)을 성장시키기 위해 필요한 건 기연도, 스승도, 무기나 영약도 아니었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세계를 구할 것이며.



[당신은 빙의했습니다!]

[목표 : 세계를 지배하려는 마왕으로부터 세계를 구하세요. 마왕을 죽이고 세계에 평화를 가져오면 당신의 승리입니다.]

[승리 보상 : 이 세계에서의 '모든 것'을 가지고 원래 세계로 귀환합니다.]



지구로 돌아갈 것이었다.


설령 함께 가져가게될 '모든 것'에 나의 죽음이 포함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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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구하기 위해 용사의 모든 걸 빼앗는 주인공, 조금 재미있을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