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회장의 '비밀의 방'. 스타스트림에서 가장 보안이 철저하다는 곳에서, 김독자는 얼얼한 복부를 쓰다듬고 있었다.

자신을 보자마자 문답 무용으로 정권을 내지른 회귀자를 떠올리며, 김독자가 탄식을 흘렸다.

"주먹 한 번 맵네."

더럽게 강한 회귀자답게 주먹 한 방에 영혼과 육신이 또 한 번 분리될 뻔했다. 니르바나를 공격할 때보다 더 힘이 실린 것처럼 느껴진 것은 아마도 착각이겠지.

- 다른 녀석들이 걱정하고 있다.

김독자가 허탈한 미소를 지은 순간, 누군가 노크를 했다.

'그래도 이번 성좌는 예의가 있군.'

오늘 하루, 권위적인 성좌들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린 김독자가 지친 목소리로 출입을 허가했다.

"들어오십시오."

문이 열리는 순간, 순백의 깃털이 휘날렸다. 천사의 날개와 악마를 연상케 하는 검은 드레스.

그 역설적인 외형과 잘 들어맞는 수식언을, 김독자는 잘 알고 있었다.

"당신이 직접 오셨군요.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

[ . . . 내가 와서 섭섭해?]

그 우리엘이 이렇게 귀여울 줄 누가 알았겠나. 
신선한 충격이었다.

"아뇨. 반갑습니다."

이에 기쁜 표정으로 돌진한 우리엘이 김독자에게 안겼다. 

[보고 싶었어, 김독자!]

물컹물컹하고 포근한 감촉에 잠시 정신을 놓은 김독자였다. 

그나저나 저 종이는 뭐지? 

우리엘의 오른손에서 펄럭이는 작은 용지가 뭔가 낯이 익었다.

"저 근데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 님'-

[우리엘이라고 불러. 수식언은 너무 딱딱해.]

" . . . 알겠습니다. 그럼 우리엘 님."

[응.]

"손에 든 용지는 설화 계약서 입니까?"

우리엘이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그리고 부끄럽다는 듯 볼을 붉히며 중얼거렸다.

[나도 네 싸인을 받고 싶어서 . . . 안 될까?]

아스모데우스도 그렇고, 요즘 성좌들 사이에서 이상한 유행이 도는 모양이다. 아니면 자신도 모르는 시나리오가 성행 중이거나. 

우주는 넓고, 기상천외한 시나리오도 많다. 어쩌면 '화신들의 싸인을 100장 이상 모으시오'가 클리어 조건인 시나리오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아무튼, 해줘서 나쁠 건 없었기에 김독자는 우리엘의 부탁을 흔쾌히 수락했다.

"됩니다."

[진짜?!]

기뻐하는 모습이 꼭 꼬리를 좌우로 흔드는 강아지 같다고 생각하며 김독자가 펜을 잡았다. 

'이러니까 연예인이라도 된 기분이네.'

생각해 보면 유료화 이전에도 연예인 못지 않은 관심을 받긴 했다. 지금처럼 호의가 담긴 시선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싸인을 받은 우리엘은 헤실헤실 웃다가 순간 표정을 굳혔다. 

[그 마왕 ■만 없었어도 내가 1등인데 . . . ]

"네?"

[아, 아무것도 아니야.]

황급히 둘러댄 우리엘이 본제를 꺼냈다.

[크흠, 그보다 독자야. 너 우리 설화 계승할 생각 없어?]

"'메시아의 길' 말씀입니까?"

열렬히 고개를 끄덕이는 우리엘을 향해 김독자는 곤란 하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그 설화를 택하면 소중한 걸 잃게 되잖아요."

[아!]

우리엘이 머리를 싸맸다. 김독자의 성기능에 하자가 생긴다면 그녀의 야시시한 공상이 조금 곤란해진다.

'끙. 어떡하지 . . . 그래. 포지션. 포지션을 바꾼다면 . . . 근데 그건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서 달라지는데 . . . 한쪽을 포기하기엔 . . . '

우리엘의 고뇌를 [전지적 독자 시점]으로 엿본 김독자가 귓바퀴를 털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건지 의심이 들 정도로 해석불가능한 문장은 마치 이계의 신격의 진언과도 같았다. 

[그럼 고자가 되도 문제 없도록 - !]

"싫습니다, 다음."

결국 칼 같이 끊어낸 김독자였다. 


*


[힝, 독자 매정해.]

'비밀의 방'에서 쫓겨난 우리엘이 <에덴>이 포진한 구역에 걸터앉아 칭얼거렸다. 그 꼴을 본 가브리엘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다.

[지■났네. 고작 화신 한 명한테 차인 거 가지고.]

[차인 거 아니거든!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댔어!]

우리엘의 반발에 가브리엘이 코웃음을 쳤다.

[그게 차인 거야.]

[■발 . . .]

가브리엘의 첨언에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우리엘이 고개를 푹 숙였다. 평소 같지 않은 소심한 대응에 가브리엘이 살짝 동요했다. 

날개를 펼친 채 힐끗 곁눈질했다. 

'이 ■이 오늘따라 왜 이러지?'

우리엘하고는 앙숙으로 소문이 난 그녀지만, 누구보다 우리엘의 슬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천사 역시 그녀였다. 

에덴의 고위급 인사인 그녀가 여기까지 온 이유도 우리엘이 멋대로 행동하지 않도록 지켜봐 달라는 서기관의 당부 때문이었다. 

가브리엘이 연회장에 오기 전 서기관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 이번 연회에 참석해 주셔야겠습니다, 가브리엘. 

- 왜?

- 일단 이것부터 짚고 넘어가야겠군요. 얼마 전, 타 성운에게 '성마대전'에 대한 설화비중을 양도받는 조건으로 <에덴>은 '별자리의 연회'에서 벌어지는 일에 개입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 그럼 안 가면 되잖아. 

- 저도 그럴 생각이었지만, 한 분이 결사반대를 하셔서 말이죠. 

- . . . 안 봐도 알겠네. 

- 화신 '김독자'에게 저희 설화를 소개하는 것까지는 괜찮습니다만, 그 이상 개입하면 골치 아파집니다. 부디 우리엘을 잘 이끌어 주십시오. 

'잘 이끌긴 개뿔.'

이런 건 요피엘한테나 맡기라고. 

풀이 죽은 우리엘을 지켜보던 가브리엘이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쌍욕할 때가 낫지, 저런 꼴은 도저히 못 봐주겠다.

가브리엘이 애써 부드러운 어투로 말했다.

[다 울었으면 이제 가자. 어차피 더 볼 것도 없잖아.]

[. . . 그래도 우리 독자랑 중혁이가 계승식에 참여하는 것까진 볼 거야.]

가브리엘이 속으로 성경 첫 장을 암송했다. 
여기서 터지면 <에덴> 망신이다. 

한편, 가브리엘의 머릿속에도 우리엘이 연호하는 그놈의 김독자, 유중혁에 대한 궁금증이 싹트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에덴>을 상대로 칼답을 한 건지, 그 이유나 한번 들어볼 생각이었다.

설화 계승식은 순조롭게 이어졌다. 

'별자리의 연회'를 담당한 상급 도깨비 '허체'가 각 화신들이 계승하기로 한 설화를 발표했다.

['셀레나 킴'은 '최후의 양심'께서 하사하신 '불굴의 이지스'설화를 계승하기로 했습니다.]

[쯧, 재수탱이들이 한몫 잡았네.]

그 뒤로, 쭉쭉 발표가 진행되는 동안, 가브리엘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서기관은 도대체 어떤 성운과 계약한 거지?'

저렇게 욕심 많은 별들이 고작 화신 몇 명을 점지하기 위해 성마대전의 비중을 양보한다고?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판단이었다. 

'도대체 누가 . . . '

그때, 한 잘생긴 화신이 단상 위로 올랐다. 

[다음은 패왕 '유중혁' 입니다!]

언제 침울해 있었냐는 듯 우리엘이 다시 활개치기 시작했다.

[중혁이다!]

[야, 목소리 좀 낮춰! 우리 쳐다보잖아!]

[뭐 어때서. 쳐다보라고 해.]

참다못한 가브리엘이 우리엘의 뒤통수를 한 대 갈기려는 순간, 장내가 갑자기 시끄러워졌다.

우리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도 그럴게 단상에 난입한 김독자가 유중혁의 팔을 잡고 함께 올린 상태였다.

[어머!]

[갑자기 왜 저래?]

상반된 태도를 보이는 두 대천사였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당황한 객석이 소란스러워졌다. 그 소란을 진압한 것은 김독자의 당돌한 선언이었다. 

"우리는 당신들의 설화를 사겠습니다! 나와 유중혁에게 설화를 팔고 싶다면 우리 '성운'과 거래하십시오."

충격이 강하면 되려 할 말을 잃는 법이랬나. 연회장이 침묵에 휩싸였다. 

그러다 <베다> 소속 성좌, 마누가 이의를 제기했다. 

질문은 크게 세 가지였다.

화신 김독자에게 지급 능력이 있는지. 아직 10번째 메인 시나리오도 거치지 못한 놈에게 성운을 세울만한 '격'이 있는지. 설사 '격'을 갖췄다고 해도 누가 그 결정에 동의할 것인지. 

이에 김독자는 차례차례 반박했다.

코인은 충분하다. 도깨비를 통해 자신의 격이 별을 코앞에 두고 있음을 증명했다. 하지만 마지막 질문에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때, 페르세포네가 나섰다.

[<명계>는 그대의 성운을 지지하겠어요.]

잠자코 관망하던 제천대성이 고했다.

[지지한다.]

연회장이 다시금 술렁이기 시작했다. 가브리엘이 불안한 눈빛으로 우리엘을 바라봤다.

[야. 아니지?]

설마 서기관이 엄포를 뒀는데 . . . 

[미안해 서기관! 나도 지지다! 대신 성운 이름은 - 흡!]

[이 미친 ■이!]

다급히 입을 막았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나마 그 뒤로 한반도의 성좌들이 연이어 지지선언한 것이 다행이었다. 

우리엘을 포함해서 딱 다섯 명을 채웠으면, 정말 빼도박도 못할 뻔했다. 

어떻게든 무마시킬 껀덕지가 있다는 건 둘째치고, 우리엘의 돌발행동에 빡돈 가브리엘이 거센 진언을 발하려는 찰나. 

쿠구구구!

불길한 격이 연회장을 침입했다. 가브리엘이 천장을 응시하며 성창을 꺼냈다. 

끝을 알 수 없는 구멍이 그곳에 있었다. 

【왜 우리를 초대하지 않았지?】

김독자를 비롯한 화신들을 대피시키고 돌아온 우리엘이 굳은 표정으로 허공에서 검을 꺼냈다. 거세게 타오르는 유황불을 '그레이트 홀'을 향해 겨누었다.

[가브리엘.]

[말 안 해도 알아.]

이계의 신격. 그것도 강한 놈'들'이었다. 격이 모자란 위인급 성좌들이 황급히 시나리오에서 이탈했다.

물론 척준경처럼 그들에게 맞서기에 충분한 격을 갖춘 이들은 다가올 전투에 대비했다. 

다른 성좌들도 격을 끌어올렸다. 도망칠 수 있으나 도망치지 않았다. 

그것은 자존심의 문제였다. 별자리의 한복판에서 이계의 신격들이 활개치는 꼴을 눈 뜨고 지켜볼 수는 없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파피루스>는 각자 설화를 준비하라! 저들을 단죄해야 한다!]

쩌저적!! 

막대한 개연의 파량에 무대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었다. 애초에 '별자리의 연회'는 대규모 전쟁을 염두에 둔 시나리오가 아니다. 시나리오가 감당할 수 있는 개연은 이미 한계선을 넘은 지 오래였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도깨비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어떻게든 무대를 봉합하려 애썼다. 

[관,관리국에 보고를!]

[무대를 확장시켜 붕괴를 막아라!]

그들이 최종적으로 선택한 방안은 서브 시나리오로 성좌들이 날뛸 개연성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상급 도깨비를 주축으로 도깨비들이 자신들의 재량을 전부 끌어모아 시나리오를 갱신했다. 

*

<서브 시나리오 - 외신 퇴치>
분류 : 서브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벌자리의 연회에 침입한 미지의 신격을 무찌르시오.
제한 시간 : ???
보상 : '외신퇴치'와 관련된 설화
실패 시 : ???

*

그러자 붕괴 속도가 차츰 느려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대다수의 성좌들이 일제히 공격을 감행했다. 

콰콰콱!!

척준경의 검이 촉수 다발을 베고 제천대성의 여의봉이 놈들의 전신을 터뜨렸다. 파피루스, 베다, 올림포스도 그 이름값이 허명이 아님을 증명하듯, 전선을 밀고 올라갔다. 

그 뒤를 따라, 우리엘과 가브리엘이 참전하려는 순간. 

띠링!

갑자기 전송된 메시지를 확인한 두 대천사가 눈을 크게 떴다.

- '메시아의 대리자'로서 하명합니다. 지금 당장 <에덴>으로 복귀하십시오. 

정말 치매가 오고 만 것일까. 잠시 불경한 생각이 든 가브리엘이었으나, 그렇다고 메타트론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메시아의 대리자.'

그 이름이 짊어진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거기에 항명하는 것은 곧 절대선에 대한 반역을 의미했다. 

타락. 

천사들이 끔찍이도 두려워하는 두 글자가 대천사들의 발목을 잡았다. 

그녀들이 망설이는 사이, 시나리오는 점점 격렬해지고 있었다. 

【미워미워미워】
【죽어죽어죽어】

간만에 시나리오의 맛을 본 이계의 신격들이 전력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그레이트 홀을 향한 성좌들의 진격에 제동이 걸렸다. 

- 츠츠츳!!

스파크가 만발하고 고성과 참격이 난무했다. 쓸려 나가는 것은 주로 이계의 신격이지만, 힘을 소진한 성좌들도 차츰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겁먹지 마라! 놈들에겐 설화가 없다!]

[우리가 쌓은 업을 저들에게 각인시키자!]

이에 거대성운을 주축으로, 성좌들도 설화를 쏟아붇기 시작했다. 섬광이 여러 차례 번쩍이고 번개를 두른 광풍에 이름 없는 것들이 찟겨나갔다. 문맥의 폭류 속에서 이계의 신격들이 울부짖었다.

【아파아파아파아파】

몇차례 격전 끝에 별들이 승기를 잡았다. 그제야 대천사들은 찜찜한 표정으로 메타트론의 말을 따랐다.

'설명이 필요할 거야, 서기관.'

그렇게 시나리오 이탈을 요청했을 때, 난데없이 경고음이 울렸다. 

[침입자가 발생했습니다!]
[침입자가 발생했습니다!]

'이제 와서?'라는 생각이 들 찰나, 연회장의 정문밖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마기에 대천사들의 표정이 뻣뻣하게 굳었다. 

가브리엘의 머릿속에서 퍼즐이 맞춰졌다.

<에덴>과 함께 있어선 안 되는 성운. 

성마대전에서 가장 큰 지분을 가지고 있는 성운.

그리고 그 지분을 일부 양도하겠다는 정신 나간 딜을 걸 수 있는 성운.

어째서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그런 성운은 스타스트림에 단 한 곳밖에 없거늘. 

콰앙!

문을 박차고 난입한 마왕이 웃으며 소리쳤다.

[마왕 받아라!]

[성운, <게티아>가 '외신 퇴치' 시나리오에 개입합니다!]

[성운, <에덴>이 시나리오에서 이탈합니다!]

흐릿해지는 사위로 비치는 정경은 그야말로 개판이었다. 상징체도 아니고 무려 진체를 끌고 온 마왕 부대. 다시금 무너지는 시나리오. 확장된 그레이트 홀 너머로 쏟아지는 이계의 신격들. 분노와 황당함에 고함을 내지르는 성좌들.

그 파국의 소용돌이에서 정작 태연하기 짝이 없는, 난장판의 주범이 한 말이란.

[다들 딸피네요?]

이딴 거라 가브리엘은 어이를 상실했다. 

[미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