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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가만히 또 생각하건대, 모든 곳의 우리 산성이 형세는 비록 좋으나, 자못 읍(邑)과 너무 동떨어지게 멀어, 급박하게 되어서야 비로소 읍에 사는 백성들을 거두어 산성으로 들어가게 하므로, 적의 기세가 조금만 완화되면 어리석은 백성들이 살림살이에 연연하여, 그 험악하고 먼 것을 꺼려서 들어가 지키려 하지 아니하고, 적의 기세가 이미 급박해져서는 늙은이를 붙잡고 어린이를 이끌고 산으로 들로 도망해 숨어서 명령에 따르려 하지 아니하는데, 하물며 그 근방 고을까지 첩입(疊入)[근방 고을 백성까지 피난보호]할 것을 바라겠습니까?


지금 호남과 영남의 성읍(城邑)이 모두 무너졌으니, 이 무너진 시기를 이용하여 담양부를 금성산성(金城山城)으로 옮겨 설치하고서, 근방의 두어 고을을 덜어다가 보태고, 그 근처 및 읍 밑의 이민(吏民)을 수합하여 성 안에서 살게 하소서. 옛날의 2묘(畝) 반(半)은 전(田)에 있고, 2묘 반은 읍에 있던 제도에 의하여 농사철에는 그 가솔을 성 안에 남겨두고 들 밖에 가서 경작(耕作)하며, 척장(滌場)을 하게 되면 가색(稼穡)을 들 밖에서 거두어 성중에 모아 보관하게 하고, 주장(主將)은 농사의 여가에 그 성황(城隍)을 수리하여, 적이 침입해 오면 그 사람과 그 성으로써 지키게 하소서.


성을 지키는 관(官)은 반드시 문무(文武)와 지략(智略)을 겸비하여 백성을 기르고 군중을 통솔하는 재간이 있는 사람을 선택하여 오래 맡겨 공효를 나타내게 하되, 그 채지(采地)를 허급해 주기를 변장의 예와 똑같이 하며, 혹은 감사(監司)나 병사(兵使)로 하여금 영(營)에 머물러 있으면서 진수(鎭守)하게 할 수 있도록 하소서.


(중략)


국가의 대계를 위해서는 연변(沿邊)의 작은 진(鎭)이나 보(堡)를 다 없애고 바닷가의 주현(州縣)을 연변의 요새지대로 이치(移置)하고서[옮겨두고서], 진ㆍ보의 방졸(防卒)들을 옮겨다 주현에 소속시켜, 반드시 그 고을 백성으로 하여금 그 고을의 성에 들어가 방어하게 하소서. 방졸(防卒)에 대해서는 신역(身役) 이외에는 절대로 호구(戶口)ㆍ잡역(雜役)으로써 침탈하지 못하게 하고, 변읍(邊邑)에 대해서는 수전(水戰) 이외에는 절대로 쇄마(刷馬)ㆍ잡사(雜事)로 징수하지 못하게 하소서. 평상시에는 전함(戰艦)을 만들어 바다 가운데 띄워 두고, 일제히 성 밑의 민정(民丁)과 읍 아래의 방졸(防卒)을 집합시켜 번갈아 교대하여 무비(武備)와 수전을 훈련시키다가, 변란이 있을 적에는 일제히 통제사(統制使)에게 소속시켜 사람마다 싸우게 한다면, 성을 지키는 것과 수전(水戰)하는 것이 거의 두 가지 다 수행될 것입니다.


출처: 간양록



요약하자면

1. 우리도 일본처럼 지방 군대는 지방에서 자체적으로 양성하자

2. 지방의 징세권을 포기하는 대신 그 재원을 통해 지방군을 아예 해당 지역만의 군대로 재편하자

3. 지방군 지휘권에게 수조권까지 부여하자



임란 때 포로로 잡힌 후 일본으로 끌려가 3년간 생활하고 온 강항이라는 성리학자가 내놓은 개혁안임

형조 좌랑까지 지낸 후 잠시 휴가를 얻어서 전라도 영광에서 생활하다가 임진왜란에 휘말린 인물이기에 조선 지방군의 문제점을 날것 그대로 관찰 가능했고 본인이 직접 소규모 의병장으로도 활동하기까지 한 만큼 그 단점을 톡톡히 느꼈기에 내놓은 방안

고려시대보다도 과격한 지방자치제로, 사실상의 봉건제로 돌아가자는 방안이었기에 임진왜란 이후로도 조선군의 허약함을 체감하고 있던 조정에서 논의가 이루어졌으나 채택되지는 못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