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


“어, 오빠.”


“얀순아! 미안한데 나 좀 도와줄 수 있을까?”


“무슨 일인데?”


“이 미친년들이 애를 납치해갔어…!”


“뭐라고? 하…”


보통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라면, 경찰한테 먼저 전화하는 게 우선일 것이다.


하지만 난 다르다. 하늘을 놀이터로 둔 여동생이 현지 경찰까지 수하로 둔 덕분에 여러 단계를 거치지 않고 다이렉트로 도움을 받는다.


이럴수록 얀순이에게 진 빚이 늘어나지만… 그건, 음, 나중에 생각하자. 지금은 아이가 우선이다.


“선 넘지 말라니까… 우선 얘네들이 어딨냐면… 뭐야, 오빠 옆방에 있는데?”


“옆방이라니?”


“아까 지갑 찾으러 간다더니 갑자기 오빠 옆방을 예약했거든.”


“허어… 일단 알겠어. 옆방 가보고 다시 전화할게. 도와줘서 고마워!”


어이가 없네. 


내려간 흔적이 전혀 없는 것도 이거 때문이었어?


머리 끝까지 차오르는 화를 겨우 삭히며 옆방으로 걸어가


-쾅쾅쾅!


“야!!! 문 열어!!!”


문짝을 샌드백이라 생각하며 두들겨 팬다.


이 년들이 선을 적당히 넘어야지, 하다하다 유괴를 해?


“얼른 쳐열라고!!!! 직원 불러서 따버리기 전에 열”


“헤헤, 자기이… 후에? 왜 미러내애…”


“아씨, 어딜 안겨? 애 어딨어.”


“아이…? 으으음~ 나 안아주면 알려줄게…♡ 덤으로 키스도 해주면… 히히히♡”


“이게 단단히 취했네. 직접 찾으면 되지. 비켜.”


“우으응… 토끼는 외로우면 죽는다니까아아…”


온몸의 혈관이 알코올로 가득 차버린 뉴저지를 제끼고 안으로 들어선다.


제일 먼저 현관 옆 침실로 가자 대체 뭔 일이 일어난건지 원탁 위에 술병이 엎어져 있고, 그 너머 침대엔 총탄자국 같이 생긴 구멍이 뚫렸다. 아이 대신 이런 어처구니 없는 것들이 있으니 짜증이 더욱 난다.


“어딨어…! 아가! 아빠 왔으니까 가자!”


“아, 지휘관…”


“애 어디에 숨겼어. 빨리 말해.”


“...싫어.”


“뭐?”


“아이 찾으면… 바로, 갈거잖아…”


“당연한 소릴 하네. 그럼 내가 여기서 ‘아이고 고맙네’ 하면서 쉬다 갈까?”


“이렇게 질질 끌다보면… 당신과 같이 있는 시간도 늘어나는 셈이지 않나…?”


“닥치고 내 딸 어딨냐고!”


“으읏…! 화, 내는 거 무서워… 지휘관…”


“야, 지금 이게 장난으로 보이냐? 너흰 지금 집행유예 중에 유괴를 한거야, 이 범죄자년들아.”


“아… 안 돼, 가지 마…! 좀… 만 더, 있어줘…”


얼마나 술을 못 마시길래 이상한 헛소리만 늘어놓는 호놀룰루까지 마저 넘기며 아이와 그 이모를 찾아나섰다.


그러나 한참을 뒤져도 침실에도, 거실에도, 화장실에도, 테라스에도 그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얼마 안 가 등은 싸늘한 기운으로 가득 차고, 머리는 슬슬 이성을 잃기 시작한다.


“대체 어딜 간 거야…!! 아가! 마저 밥 먹어야지! 아빠 여기 있으니까 얼른 와!!”


“자, 꼬옥 안아주면 알려준다니까…”


“그럼 나도… 으, 안아줄, 수 있어…?”


“하아… 내가 그렇게 해서 애 찾을바엔 그냥 경찰을 부를련다. 제발 부탁하는데 일 크게 만들지 말자?”


놀리는건지 옆에서 안아달라며 팔을 벌리는 저 두 싸이코패스들에게 순간 손이 올라가려고 했지만, 최소한의 이성을 쥐어짜내 겨우 참고 수색을 이어나간다.


이제 방은 다 뒤져봤고, 옷장을 뒤져볼 차례. 


예로부터 숨바꼭질 단골 장소인 곳이니 보이는 옷장마다 문을 열어가면서 아이가 있길 비는데, 한 침실에 있던 옷장 속 이불이 이질적으로 수납되어 있었다.


촉이 온다. 바로 이불을 잡아당기자,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내 딸아이가 이모의 품에 안겨 눈물을 흘리면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후후, 들켰네?🎶


“여기서 뭐 하냐…? 어, 우리 공주님은 왜 울어?!”


“아빠아… 훌쩍, 이걸로 엄마랑 전화하는데에, 엄마도 아빠가 보고 싶대애…”


“이게 뭔…”


“지휘관…? 지휘관 맞지? 아아, 지휘관…”


“......”


세인트루이스의 손에 들려있던 태블릿에 그녀와 같은 파란 머리이지만 조금 앳된 여인이 비춰진다.


이 아이의 친모이자 세인트루이스의 동생인 헬레나가 딸과 같이 눈물을 똑똑 흘리며 나와 눈을 마주하고, 제발 열리지 않았으면 하는 입을 연다.


“나도, 나도 가고 싶었는데… 언니와 호놀룰루를 따라서 진주만으로 돌아가고 싶었는데에… 끅, 지휘관, 우리 아이는, 자알 있는거야아…?”


“아, 진짜…”


“엄마아, 그래서 언제 와아…?”


“걱정마, 금방 갈거니까…! 우리 아가, 아빠 말 잘 듣고 있어야 돼, 알겠지…?”


“응…!”


“그래, 엄마 금방 올테니 걱정하지 마. 헬레나, 종종 애 데리고 면회는 갈게. 내가 너한테 해줄 말은 이거 뿐이야.”


“면회라니…?”


“죄를 지었으면, 그 대가는 치뤄야지? 니 언니가 지금 하고 있는 것처럼.”


“헬레나, 미안해. 나와 호놀룰루는 공군장관도 하고 있는 지휘관군의 여동생한테 잡혀버렸어.”


“뭐라고?! 그 여자가 지휘관의 여동생이었어…?”


“나도 어제 알았어. 엄청 독한 여자더라구? 우리한테 위치추적기도 달고, 24시간 내내 미사일을 겨누고 있다고 협박하고, 너무 무섭다니까.”


“...머지않아 올 너의 모습이야, 헬레나.”


“아…”


언니와 친구의 말로, 그와 동시에 자신의 미래에 충격을 금치 못하는 헬레나. 정말 놀랍게도 별 감정이 안 든다.


내가 이렇게 공과 사가 철저한 놈은 절대 아닌데, 최근 별에 별 거지같은 일을 워낙 많이 당한지라 감정이 이렇게 죽어버렸다.


‘넌 내게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아야 하는 게 당연하지.’ 이러면서 그러려니 하고 있었던 나, 이것이 바로 해탈의 경지?


한편 이불이 들춰지면서 빛이 생긴 덕분에 세인트루이스의 상처가 선명하게 화면에 비춰졌다. 


“언니, 얼굴에 상처가…”


“지휘관군이 남긴 상처야.”


“지휘관이?! 지휘관이 왜 언니한테…?”


“에라이,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뭐 때문에 생긴 거야…?”


“호놀룰루가 챙겼던 45구경 권총이 꽤 아프더라구.”


“지휘관이 쐈구나… 근데 우린 칸센인데 왜 총에 데미지를…”


“의장 없는 너희들은 그냥 평범한 여자야. 힘, 체력, 신체, 모든 게 평범해지지.”


“기본 5인치부터 시작하는 포탄에 맞아도 거뜬하던 년들이 의장이 없어지니까 0.45인치의 조그마한 총알에도 피를 흘리는데, 굳이 미사일을 쏴야할까 싶긴 하네.”


“아......"


“아가, 가자. 밥 먹어야지.”


얀순이도 이런 생각하고 있으려나? 역시 사람한테 미사일은 끔찍한 것도 끔찍한 거지만 수지타산이 안 맞아.


어쨌든, 영양가도 없고 듣기도 싫은 이야기는 집어치우고 아이를 안아들어 나가려고 하자, 


“아빠… 우리, 엄마랑 더 있으면 안 돼애…?”


“...…”


“엄마가 조금만 있으면 오지만… 그래도…”


늘 그렇듯 딜레마가 던져진다.


아빠로써 아이들의 말을 무조건 들어주고 싶지만, 살다보면 아주 가끔씩은 이기적인 사람이 되고 싶기도 하다. 그 때가 지금이다.


“아가, 이런 말 들어봤을지 모르겠는데… 기대를 점점 키울수록 기쁨도 그만큼 커진단다.”


“무슨 말이야 그게…?”


“어떻게 설명해야 하냐면… 음! 우리 공주님들한테 동생이 곧 찾아올거야.”


“동생을 기다리는 동안 시간이 흐르면서 기대도 점점 커지고, 그렇게 만나기 직전이 되면 기다린 만큼 더욱 설레고, 두근거리고 하는거지.”


“그럼, 동생을 기다리는 것처럼 엄마도 기다렸다가 만나면 그만큼 더 행복하다는거야…?”


“그렇지! 조금씩 조금씩 쌓아놓았다가 며칠 후에 빵! 하고 터뜨리는거야.”


“엄마는 어때…?”


“아가 말대로 조금만 더 있어주면 안 될까, 지휘관…?”


“예엠병.”


“그게 무슨, 말이야?”


“앗, 아냐아냐! 아빠가 순간 나쁜 말을 써버렸네. 아빠처럼 나쁜 짓 하면 절대 안 돼, 알겠지?”


“응…”


“...야, 양심이란 게 있으면 제발 뉘우치는 시늉이라도 해. 애 앞에서 안 부끄러워?”


“그… 래도, 한 달만에 지휘관을 만나서…”


“됐고, 난 너희들과 대화는 물론이고 같은 공간에 있는 것조차 토나올 정도로 싫은데 애들 덕분에 겨우겨우 참는거야. 알아?”


“아냐, 아빠, 나 아까 많이 먹었으니까 그냥 엄마랑 놀다 갈래… 지금 엄마와 있는 게 더 좋아.”


“음, 우리 공주님, 결국 미래 대신 지금을 택했구나… 그러면 엄마랑 이모랑 같이 놀고 있다가 올래? 아빠는 일 있어서 가봐야되니까, 다 놀면 넘어와. 어떻게 오는지 알지?”


“아…! 응! 엄마아~!”


“아가… 화면으로 말고 직접 보고 싶은데… 지휘관은 어디 가?”


“방금 말했잖아. 너희들이랑 같이 있는 것도 싫다고. 그리고 애한테 이상한 짓 하면, 뒷감당은 알아서 해.”


“아쉬운데…”


“자기이, 더 있다 가아아…”


어쩜 저렇게 뻔뻔한 짓만 골라서 할까.


애까지 팔아가면서 내 얼굴을 그렇게 보고 싶은건가?


말은 이기적이라고 했지만, 결국 위험한 곳에 자식을 놔두고 왔으니 불안한 마음이 가시질 않는다.


“지휘관님! 아이는 어딨어요…?”


“이것들이 우리 옆방에 있더라고… 그래서 이모와 같이 엄마랑 전화하면서 놀고 온대. 아, 나머지 애들은 밥 다먹고 놀고 있구나.”


“네… 근데, 어떻게 지휘관님은… 잘못 하나 없는 사람이 하루도 편히 쉬지 못하는 거에요…”


“그러게… 내가 전생에 큰 죄를 지었나봐.”


“왜, 왜애… 당신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오… 흐윽…”


“이겨내면 돼. 죄가 있다면 용서를 구하고, 문제가 있다면 해결하고, 걱정마. 괜찮을 거야.”


카리나도 내 걱정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한 모양이다. 그녀를 꼭 안아주면서 토닥여주자, 티셔츠의 가슴팍이 점차 젖어간다.


내 와이프는 참 눈물이 많네. 어제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이런 말할 자격 없긴 하지만… 가족들이 슬픔의 눈물 대신 기쁨의 눈물을 흘리게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아, 얀순아. 잘 해결했어. 고마워.”


“아냐, 어제 일 갚은 거라고 생각해. 오빠꺼 후드는 조만간 돌려줄게.”


“응. 그리고 어제 도망가서 미안해…”


“아냐. 내가 잘못한 거니까… 늘 말하지만 미안하다는 말은 내 앞에서 절대 하지마.”


“아, 어어. 그래, 푹 쉬어.”


“오빠도.”


얀순이와의 일도 일단 마무리됐으니, 카리나를 마저 달래주면서 오후를 보냈다. 최근 들어 하루에 한명꼴로 여자를 울리고 다니니, 참 나쁜 놈이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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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도 아이는 아무런 탈 없이 무사히 방으로 돌아왔고, 불안감이 풀린 덕분인지 시간은 훌쩍 지나갔다.


아이들은 하나하나 이불을 덮으며 숲속의 공주님이 되어갔고, 어느덧 나와 카리나만 남아 침대에 누워 얘기를 나눈다.


“보트는 그 녀석들 오기 전에 후딱 사고 도망가자. 내일도 난동부릴 게 뻔하니까.”


“네. 그리고 옆방…”


“에이, 걱정마. 별 일 없을거야. 괜찮아.”


“지휘관님의 단골멘트가 다 나왔네요…”


“아, 이게 내 단골멘트야?”


“무슨 일이 생기든 전부 직접 해결하려고 하시니 그런 말이 입에 붙죠… 지휘관님, 여러번 말씀드리는 거지만… 당신 곁엔 저도 있다는 걸 꼭 알아주셨으면 해요.”


“잘 알지. 내 마누라가 얼마나 만능인데.”


“마누라는 부끄럽다니까요오…”


“하하, 재밌잖아.”


“으… 정말…”


“크크크, 이제 잘까?”


“우움… 네에… 사랑해요, 지휘관님… 안녕히 주무세요오…”


“사랑해, 카린. 잘 자.”


피날레로 부부끼리 하루를 마무리하는 인사를 나누며, 카리나도 아이들의 뒤를 따른다.


이제 내 차례… 인데…


‘음…’


10분.


‘필살기! 양 한마리… 양 두마리…’


30분.


‘...양 칠백 여든 다섯마리… 왜 잠이 안 오지??’


1시간이 지나도 눈과 정신이 말똥말똥하다.


낮잠을 잔 것도 아니고, 붕붕드링크를 마신 것도 아닌데 뭐지?


“카린… 자…?”


“이히히히… 디이히간니이잉…”


“자는구나. 뭔 꿈을 꾸길래 거기서도 나를 찾니…?”


결국 품속에서 잠든 아내를 잠시 놓아주고, 침대에서 스리슬쩍 일어났다.


머리를 긁적이면서 뭐가 문제인가 생각해보다가, 바람이나 쐴 겸 대충 옷을 걸치고 호텔을 나선다.


문제의 옆방에서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 보니, 셋 다 아주 잘 자는 것 같다. 위험요소가 줄어들었으니 발걸음이 가볍다.


“고즈넉하이, 좋구만.”


아저씨 다 됐네, 다 됐어. 나이 먹고 밤잠이 없어지니 이렇게 싸돌아다니는 거 아냐.


-꼬르륵~


‘엇, 이 소리는…! 야식을 먹으라는 신의 계시!’


그러니 아저씨답게? 야식도 먹어야겠다~


나 혼자만의 야식. 처자식 몰래 즐기는 합법적인 일탈 아니겠는가?


마침 저 멀리 고향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24시간 한인마트가 있다. 오랜만에 얼큰한 라면에 김치까지 얹어서 크으… 벌써부터 군침이 싸악 도네.


“이야. 양은냄비에, 묵은지에, 콩나물, 파, 계란에 심지어 햄, 만두까지? 이건 지나치는 게 미친놈이고 도라이야.”


여기가 곧 유토피아요, 발할라이다. 코리안 스타일 야식에 필요한 모든 걸 구매하고 신이 나, 혼자 막 중얼거리며 호텔로 돌아갔다.


방에 들어간 순간부터 그 누구도 깨지 않도록 살금살금… 모든 소리를 최대한 죽이며 인덕션에 물을 올리고~ 라면봉지도 하나하나 뜯어서~























“후아아암… 아빠, 뭐해…?”


“히익?!”


“히히~ 아빠 놀래켰다!”


“공주들…! 안 자…?”


“소리 듣고 깼어…”


“아빠아… 뭐 드세요…?”


“이거, 과자야…?”


는 바로 컷. 저주에서 풀려난 다섯명의 공주님들에게 현행범으로 검거당했다.


꼬마 여우들과 프린츠 오이겐, UMP 자매의 아이들이 그새 식탁에 앉아서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아빠가 뭐하나 쭉 지켜보고 있던 것이었다.


이러면 참 곤란해지는데… 음… 아이들에게 밤에 먹는 라면이라는 합법 마약을 알려줘야 하나…? 


“라면이라고 들어봤니…?”


“라면…? 라멘은 아는데…”


“어어! 라멘을 아빠 고향에서 이러쿵저러쿵 바꿔서 만든 게 라면이야!”


“그렇구나… 맛있어…?”


“어어어… 맛있긴 한데… 어…”


“우리가 뺏어먹을까봐 그러지!”


“아냐아냐! 아빠가 감히 공주님들한테 그러겠어? 절대 그럴 일 없지…”


당연하다. 세상 어느 아빠가 자식한테 라면 한 젓갈조차 안 나눠주겠어?


다만, 밤에 먹는 라면은 다음날 아침에 엄청난 부작용을 불러오는 게 문제이다. 공주님들의 얼굴이 띵띵 부어버리면… 어우야, 소름이 쫙 끼치네.


“하, 이거 참 고민이네…”


“이거 아무 냄새도 안 나. 맛없을 것 같아.”


“우리 공주님들이 이거 먹고 싶으면 당연히 아빠가 끓여주겠지만, 대신 아침에 얼굴이 좀 부을 수 있어. 그래도 괜찮아?”


“응! 아침만 그렇고 시간 지나면 없어지잖아!”


“어, 그렇지…?”


“언니, 이거 봐봐! 엄청 맛있어보여…”


“꿀꺽, 맛있겠다아…”


하지만 내 바램과 달리 눈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군침을 삼키는 식으로 답하는 아이들, 아빠가 하면 안 되는 짓이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


한 5살은 더 먹어야 해금되는건데… 쓰읍, 어쩔 수 없지. 조기교육한다고 생각하자.


‘4개 끓이면 되겠지… 아니다, 3개 끓이고 하나는 생라면으로 줘야지.’ 


“얘들아, 한 번 먹어봐.”


우선 에피타이저로 생라면을 굽고 스프를 살짝 쳐서 만든 즉석 과자. 살짝 매우면서 짭조름한 게 아주 일품이거든요.


“오…! 과자다!”


“아앙~ 움! 마시써어…!”


“안 매워?”


“응!”


“히히, 하나 더 먹고 싶은데…”


“나도…”


“요 녀석들, 먹을줄 아는구나.”


하, 이러면 뿌듯해지잖아. 욕구가 팍 솟는다고. 아이들에게 일본과 독일의 피 말고도 한국의 피 역시 흐르는 걸 알려주고 싶다. 결국 반은 한국인이니까.


한국인에게 라면이란 그냥 만능이지, 만능. 모든 상황에서 반은 가는 식량이 라면이라고.


“계란도 들어가?”


“응. 이게 별미거든.”


“여섯개 넣자!”


“그럼. 노른자가 제일 맛있고 좋은 거 알지?”


“이건… 채소인가? 이게 뭐야, 아빠?”


“콩나물이라고, 건강에 좋은 거야. 아삭아삭하고 고소하고 국물이 시원해져서 맛있어.”


“시원해…? 먹으면 차가워?”


“아, 이걸 뭐라고 해야 하냐면… 어른이 되면 알 거야. 어…”


“치이, 한참 남았잖아!”


물이 끓기 시작하자 스프와 건더기를 먼저 넣고, 사리를 적당히 부숴 넣고, 콩나물과 파, 햄, 만두도 팍팍 넣어준 뒤 화룡점정으로 달걀을 톡 까준다.


그렇게 더 끓이면서 달걀이 반숙이 될 정도면, 조리 끝! 앞접시, 포크를 먼저 나눠주고 집게로 덜어서 주면 진짜 끝!


“자, 먹자. 친구들과 카린 씨한테 비밀로 해야 돼.”


-잘 먹겠습니다아~


포크로 열심히 꼬고 집어서 입에 넣는 저 모습이 아주 사랑스럽다. 정작 난 먹지도 않았는데 벌써 배가 불러가는 게 크윽… 심장병 오겠네 정말로.


정말 놀라웠던 점은 아이들의 입맛엔 꽤 매운 라면인데 아무 말없이 잘 먹는다. 이거 어른들도 조금 먹기 힘든건데 진짜 뭐지? 내 코리안 스파이시 유전자가 발동한건가?


“다들 잘 먹네. 아유, 예뻐라. 그럼 아빠는… 크으, 군침 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먹으라 하고 묵은지 한조각을 쓰윽 라면에 올려 먹으려는데, 다들 이건 또 뭔가 하는 표정으로 먹는 걸 멈추고 날 바라본다.


“그건 뭐야, 아빠?”


“김치. 아빠 고향 음식의 상징과 다름없는 반찬이야. 맵고 짤 수도 있는데 먹어볼래?”


“집에서 먹던 자우어크라우트 느낌이지 않을까?”


“어어, 그거의 아빠 고향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돼. 자, 여기.”


“우움… 와, 이거랑 엄청 잘 어울려!”


“결국 라면과 김치 조합을 깨달아버렸구나…”


“나도 먹을래!”


“으음… 콜록, 콜록! 매워…”


“아빠아… 무울 어디써요오…?”


“꽤 맵지? 물, 물… 여기, 천천히 마셔.”


꼬마 여우들은 이상하게도 라면은 잘 먹으나 김치는 못 먹는다. 라면의 원조가 라멘이고, 라멘은 일본 음식이고, 저 아이들도 일본 혈통인데, 한국 다음으로 김치 많이 먹는 나라가 일본… 어… 암튼 뭐 못 먹을 수도 있지.


그렇게 세 봉지의 라면은 한참 성장기인 아이들의 뱃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건더기 하나 안 남기고. 


-잘 먹었습니다!


“배부르다아~”


“이건 아빠가 치울게. 아, 먹고 바로 누우면 안 되는 거 알지?”


“응… 그럼 이제 뭐하지…”


“잠도 다 깼는데…”


“안에서 놀 수도 없고…”


“흠, 그러면… 공주님들, 정리 끝나면 소화도 할 겸 아빠랑 밤산책이나 나가자. 어때?”


“아…! 응! 바다 갈래!”


“바다! 바다!”


“물은 안 들어가고, 바람만…”


“얼른 가자, 아빠!”


“어이구, 한 공주님은 벌써 나갔네…”


프린츠 오이겐의 아이는 말도 없이 벌써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러 갔고, 다른 아이들도 차례차례 신발을 신으며 그 뒤를 따른다. 새벽에 밖에서 돌아다니는 것이 처음일 아이들은 여태껏 보지 못했던 밤의 진가에 신난 모양새이다. 


시간이 늦어서 그런지 건전하다고 하기에 어려운 요소들이 대부분인 해변이지만, 오히려 그 요소들이 도시를 화려하게 장식하면서 흥을 돋운다.


“귀여운 꼬마들이네~ 자, 맛있는 거 사먹으렴.”


“엥?! 아뇨아뇨! 괜찮습니다! 갑자기 뭔 돈을…”


“기분 좋아서 주는 거죠~ 이걸로 아이들 과자라도 사다줘요? 얘들아, 2차는 여기로 가자~!”


“아… 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착한 언니다!”


“100이면 얼마나 큰거야…?”


좀 노실 것 같은 여대생 무리가 뜬금없이 아이들에게 소매넣기를 한다던지


“우와, 이 꼬마들 좀 봐! 여우귀랑 꼬리가 있어!”


“어디? 오, 정말이네?”


“아, 얘들아, 모자 써. 옳지.”


“우으으… 아빠아…”


“무, 서워요…”


“머리띠랑 장식이겠지. 어머, 애들 놀라서 어떡해…! 죄송해요. 저희가 좀 취해서… 많이 겁 먹은 것 같은데…”


“아니에요. 다음부턴 주의해주세요.”


“얘들아, 언니가 대신 사과할게. 이걸로 맛있는 거라도 사먹어. 야, 너희들은 왜 애를 겁 먹이고 그래? 아무리 취했어도 처음 보는 애기들을 막 만지려고 하냐, 이 년들아!?”


“예? 아뇨, 됐어요! 괜찮아요!”


“아이, 그러지 마시고, 죄송해서 그래요. 걱정마시고 아이들 맛있는 거 사다주세요~ 따라와, 이 시끼들아! 내가 너희 때문에 못 살아!!


“어…”


꼬마 여우들을 놀라게 한 죄로 자진해서 벌금을 내고 간 아가씨들이라던지


“오? 야~! 얀붸엥~!”


“와, 네가 왜 여깄어?!”


“이 새끼 이거, 한달만에 보네? 신혼여행 왔지 새꺄~”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야, 세상 좁네 참… 여기서 이렇게 만나냐.”


“그러니까 말이다. 나 결혼식하던 날에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갔던 새끼를 여기서 만나니까 참 오묘하네.”


“아이, 인마, 애들 있는데 욕을 확.”


“잉? 애들? 헉! 이, 이 아이들이… 그… 뉴, 뉴ㅅ…”


“아, 이 친구들이구나…”


“쉿! 얘들아, 아빠 친구야. 인사해.”


-안녕하세요!


“어어… 그래… 삼촌이랑 처음 보지? 다들 참 예쁘네…”


“엄마가 엄마이니… 쩝...”


“그, 힘내라 인마… 내가 해줄 말이 이거밖에 없다…”


“얀붕 씨, 힘내세요…”


“에이, 아냐. 힘내라뇨. 누가 뭐라 해도 결국 내 딸들인데. 그치, 공주님들?”


“응! 우린 아빠 딸이야!”


“아빤 우리 아빠고!”


“...야, 기특하네. 자, 삼촌이 기분이다! 우리 강아지들, 까까 사먹어. 아빠한테 절대 주면 안 돼.”


“야이, 됐어됐어! 이미 모르는 사람들한테 두번이나 받았어!”


“거참, 내가 친구 딸내미들한테 용돈 좀 주겠다는데 시꺼! 자기야, 여기!”


“삼촌과 이모가 강아지들 귀여워서 주는거야. 장난감도 사고 그래, 알겠지?”


-네에!


-감사합니다아!


“잘못하면 버릇 든다고!”


“버릇은 개뿔이! 잘못 안 하면 되지! 옳지, 어서 넣어둬. 아빠가 뺏으려고 하면 삼촌 불러, 알겠지?”


“하…”


“뭘 한숨 쉬어? 아, 그리고 너 얀순이랑 다시 만났다면서?”


“얀순이가 내 상관이야…”


“어유, 뭔 개족보냐. 상관 여동생에 부하 오빠라니… 얀순이가 너 찾으려고 그 자리까지 간건 아냐?”


“당연히 알지. 재회했을 때 처음 한 말이 그거였는데.”


“이야… 걔도 가만 보면 참 대단해. 오빠 찾겠다고 저기 이역만리 떨어진 미국에서 한 자리 먹었으니… 근데 넌 왜 그런 동생한테 말도 없이 집 나가냐, 인마.”


“독립시키려고 그랬던건데 역효과만 수두룩하게 나더라… 하…”


“으이그… 그럼 얀순이가 애들 고모되겠네?”


“그치. 나 몰래 애들한테 계속 뭐 사주고 그러더라고.”


“고모? 우리 고모 엄청 예뻐요!”


“엄청 착하시고!”


“그럼그럼, 삼촌도 예전에 고모 몇 번 봤었는데 엄청 예쁘고 착… 씁, 착한 건 아닌 것 가타악!”


“애들 앞에선 그냥 그런가보다 해!”


“아오옥… 알겠어 자기야… 아, 자기도 얀순이랑 같은 학교 나왔잖아?”


“나…? 응, 얀순이와 꽤 친하게 지냈지. 얀붕 씨 좋아하던 건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네.”


“아, 얀순이 친구셨어요?”


“네. 얀순이… 초중고 모두 같이 다니면서 느낀 바로는 착할 땐 참 착했던 친구였어요. 반대로 화나면… 일주일 동안 학교에 피바람이 불었죠.”


“아하하… 그건 지금도 그래요… 아니, 그때보다 훨씬 더 할 거예요, 사실…”


“걔는 끝이 없네… 제 기준으로 유독 무서웠던 때가 중3이었나…? 그때부터 뭔가 권력에 심취한 느낌으로 학급을, 학년을, 학교를, 지역을 순서대로 야금야금 먹어갔었죠…” 


“중3이면 우리 성인된, 어! 너 사관학교 입학했을 때네! 그때부터 오빠 찾으려고 시동 건 거였어! 야, 이거, 보면 볼수록 재밌네?”


“재밌기는… 아무튼 고등학교에서도 똑같이 그랬는데 전 점점 적응해서 그런가, 성인되면서 헤어질 때까지 친하게 지냈어요.”


“끼리끼리 다녔네. 학창시절 내내 얀순이는 너 쫓아다녔고, 우리 자기는 나 쫓아다녔고, 어우… 이래서 여자를 조심하라는건가…”


“뭘 조심해?”


“아, 아니야…”


“무슨 이야긴지 하나도 모르겠어…”


“나도…”


“고모가 옛날엔 무서우셨나봐…”


“지금은 어~엄청 착하신데…”


“강아지들은 몰라도 돼. 얀순이가 알면… 오우, 소름 돋아… 아, 이제 가봐야겠다. 3일 뒤에 귀국하니까 할 거 없으면 연락해라! 강아지들도 나중에 봐!”


“그래, 가라…”


-안녕히 가세요!


하와이에 신혼여행 온 친구 부부의 용돈 공격까지, 오늘 뭔 날인가? 로또 사라는 신호인가?


흥이 너무 난 나머지 씀씀이도 커진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초면인 아이들한테 돈을 막 쥐어주는 어이 無 상황, 거절하려고 해도 순식간에 쥐어주고 사라지니 뭐라 할 방도가 없다.


“너무 많이 받았어…”


“100 하나, 둘… 50 하나, 둘, 셋… 20 하나… 둘… 10 하나… 다 더하면… 400!”


“무뭐?! 400 달러나 받았다고?!”


“응! 400!”


“이 지렁이 같은 게 달러야?”


덕분에 아이들은 1시간짜리 짧은 산책을 하면서 한화로 약 54만원의 과자값을 벌었다. 


이런 얼탱이 없는 해프닝으로 정신이 홀딱 나가 호텔에 돌아가자마자 곯아떨어졌다. 결국 자긴 잤으니 결과만 좋으면 됐지 뭐… 



.



.



.



.



.



.



“하아암… 지휘관님, 안녕히 주무셨, 지휘관님?!”


“어어으… 안녕, 카린… 왜…?”


“지휘관님, 얼굴이… 얼굴이 엄청 부었어요…!!”


“아… 어제 라면 먹고 잤거든…”


“어쩐지… 새벽에 옆이 허전하다 했더니…”


휴대폰으로 얼굴을 비추자 이게 사람 얼굴인가, 블롭피쉬 얼굴인가 싶다.


설마 싶어서 라면을 같이 먹었던 다섯 공주님들의 얼굴도 봤는데, 저 말랑말랑한 볼살이 살짝 올라온 것 빼곤 아주 멀쩡하다. 미모의 유전자는 어디 안 가나 보다.


하와이 여행 사흘째, 아침이 지나가면서 아이들은 해수욕을 즐기러 갔고, 나와 카리나는 어제 못했던 보트 구매 작전을 재개했다. 


“애들 돌봐주는 거 힘들텐데 흔쾌히 들어줘서 고마워. 그럼 부탁할게.”


“걱정마세요, 지휘관님. 아이들 점심도 저희가 해결할테니 카린 씨와 좋은 시간 보내세요.”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수고비는 잭다니엘 한 병으로 받도록 하지!”


“어휴, 이 술고래 누님아… 저녁에 사줄게. 얘들아, 아빠 가볼게. 이분들 말 잘 들으면서 안전하게 놀아야 돼, 알겠지?”


-네에!


-응!


-다녀오세요, 아빠!


-카린 씨도요!


요크타운과 M16이 아이들의 보모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걱정은 전혀 되지 않지만, 정작 부모인 우리가 이렇게 놀러다니는 게 찜찜하긴 하다. 저녁에 제대로 놀아줘야겠네.


“쉬시시… 어디…”


“없어요…?”


“음… 어, 없어! 얼른 가자!”


오늘은 운이 따르는건지 튜브 상점이 조용했고, 이를 박박 갈고 있을 비글들이 올까봐 눈에 보이는대로 그럴싸한 고무보트를 구매한 뒤 재빠르게 도망쳤다.


“휴우… 이쯤이면 됐겠지.”


“그런데 지휘관님, 이거 입으로 불기엔 너무 크지 않아요…?”


“아.”


에헤이, 펌프를 깜빡했네.


이걸 호흡으로 불어넣으면 내 폐와 머리가 박살날 게 뻔하니, 가게로 돌아가 적당한 펌프도 구매하고 다시 카리나에게 돌아가려는데 뭔가 찜찜하다.


“음… 뭘 두고온 거 같은데…”


“뭐지… 뭐지…? 아! 붕대랑 연고!”


가방이 뭔가 허해서 보니 그저께 다친 상처 치료에 필요한 의료품을 두고 온 것이었다. 한바탕 적신 뒤에 교체하려고 했는데, 결국 오늘도 순탄치는 않구만.


“어, 카린. 나 붕대 두고 와서 호텔 좀 다녀올게. 시원한 곳에서 쉬고 있어!”


“지휘관니임! 제가 그렇게 말했잖아요…!”


“미안… 깜빡해뿟네… 어쨌든 금방 갔다올게!”


아내에게 연거푸 사과하며 호텔로 달려간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저녁식사용 식재료도 구매해 가기로 했고, 덕분에 양손 모두 묵직한 봉투가 자리하게 되었다.


“엥, 얀순이? 쟤가 왜 저기서 나온대?”


“가만 보자… 저저저! 내 옷 빨아서 준다 해놓고 자기가 입고 다니네! 요 녀석이…!”


저 멀찍이 보이는 호텔의 입구에 ‘이건 운동이다. 운동! 하체를 단련하는 운동 말이다!’ 라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더욱 스퍼트를 내던 중, 익숙한 무리들이 호텔에서 나와 사라진다.


그 정체는 얀순이와 보좌관들이었고 정장차림에 전혀 안 어울리는 내 후드집업에 대해 한 마디 하려고 전화기를 꺼내드는데,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앞의 엘리베이터가 닫히려고 하는 거 아닌가?


“잠시만요! 잠시만요!!”


-덜컹!


“힉?!”


“아휴, 감사합니다…! 하마터면 놓칠 뻔 했네…”


곧바로 달려가 문틈 사이로 손을 집어넣으며 간신히 탑승했다. 버튼 옆에 있던 여성분이 깜짝 놀랄 정도였다.


먼저 타있던 아가씨들에게 머리를 숙이며, 25층을 누르고 문을 닫았다. 자기들끼리 날 보고 수군거리는데 뒷담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후우… 얘는 내 후드집업 언제 돌려주려고 이래…”


“후드… 집업…?”


“네?”


“아, 아니… 에, 요…”


“아, 네… 흠… 뭐지, 목소리가 귀에 익은데…?”


“.....!”


“저, 실례지만…”


그에 지기 싫었던건지,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 후드집업에 혼자서 중얼거리던 중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뭔가 싶어 뒤를 돌아보자 목소리의 주인공 같은 여성분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푹 숙인다. 버튼 앞에 있던 그녀와 상당히 비슷하게 생긴 게 서로 혈육인 것 같다.


이러면 괜히 아는 사람인가 궁금해서 다가가고 싶은데… 흐으으음… 누구지? 분명히 어디서 들어본 목소린데…


-우우우웅


“어, 어! 여보세요! 야, 내꺼 후드집업 언제 줄거야?!”


아, 요거요거, 타이밍 딱 좋게 전화를 하시네. 


저 사람이 나와 인연이 있는가는 나중에 만날 일 있을 때 물어보면 되는거고, 지금은 얀순이와의 일이 먼저다. 바로 전화로 그녀를 추궁했다.


“응? 후드집업? 아, 그거 아직 안 빨았어.”


“하이구, 아직 안 빨았다고? 욘석아! 방금 전에 당당히 입으면서 가는 거 다 봤어!”


“...뭔 소리야…?”


“뭔 소리냐니? 나 있는 호텔에서 나왔잖아? 옆에 정장 입은 아저씨들 끼고 캐딜락 타고 가더만.”


“아, 그걸 어떻게 본…”


“으이구~ 요 조그만한 녀석아. 오빠 따라오려면 한참 멀었다~ 오빠가 거짓말은 하지 말라고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말했거늘…” 


“그, 그게… 아! 오빠 몰래 애들 간식이랑 먹을 거 두고 간 거야…! 그러면서 옷도 두고 나올려고 했는데 깜빡하고 잊고 나… 으…”


“아, 나 몰래 맛있는 거 사주고 갔다고? 고마워. 이따가 다시 전화하면서 감사인사 하라고 할게.”


“오빠 속인 건 미안하지만… 옷은 조금만 더 입, 아니, 그냥 내가 가지면 안 될까…?”


“그래.”


“어, 정말?!”


“안 된다고. 나 외투가 그거밖에 없어…”


“장난치지 말고오…! 좋은 걸로 사줄게, 응? 오빠아…”


“돈 아깝게 뭘 새로 사. 오늘까지 잘 빨아서 갖다놔.”


“애들 것까지 다 사줄게! 디자인도 다 맞춰서 가족사진 찍을 때 쓰면 되겠다, 그치?”


“흐음… 아니, 됐어! 안 사줘도 돼. 어제 애 찾아준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뭘 더 사주려고 그래.”


“아… 그러면… 어제 도와준 값으로 이걸 받는 건 어때?


“값을 그걸로 받는다라… 흠, 이럼 고민되는데…”


“괜찮은 거래지?”


-띵! 24층입니다.


“어어, 잠시만, 사람들 내려야 해서.”


한참 통화를 하던 새에 엘리베이터는 내 방의 바로 아래층에 도착했고, 먼저 탔던 여자들이 심기가 불편한 모습으로 내린다. 얀순이와 통화하느라 민폐 끼친 것 같아서 죄송스럽네.


직후 엘리베이터가 25층에 도착하고, 행여나 옆방의 불청객들이 들을까봐 조심히 방에 들어가서야 통화를 재개할 수 있었다.


“근데 뭐 때문에 전화했어?”


“간식 두고 간 거 말해주려고.”


“몰래라면서?”


“이제 알았으니까 몰래 맞지? 냉동실에 뒀으니까 맛있게 먹으라고 전해줘~”


“그래, 고마워.”


“오빠야말로. 돌아와서 옷은 내가 갖는거다?”


“흐으으으으음… 일단 생각 좀 해보고.”


“쳇.”


“뭐라고? 오빠한테 혀 찬거야?”


“몰라.”


“으이그으이그~ 삐쳤어?”


“시끄러! 끊어!”


“아아이… 여보세요? 쩝… 이게 차라리 낫지, 뭐.”


얀순이를 놀리는 건 잠자는 사자의 콧털을 건드리는 것과 같다. 스릴 넘치고 재밌지만, 만약 얀순이가 제대로 화나서 이빨을 드러내면 그대로 콰직! 하고 씹히는 그런 거다.


뭐 어쨌든, 얀순이가 냉동실에 넣고 간 아이스크림을 하나 꺼내 들어 입에 물고, 필요한 것을 모두 챙긴 뒤 서둘러 카리나에게 돌아갔다.


쨍쨍한 햇빛 아래서 더위와 고군분투하고 있을 그녀에게 줄 아이스크림도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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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