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이상 지속된 긴 전쟁...

수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잃었고, 삶의 터전이 불타버렸다.


사악한 마녀의 군단을 저지하기 위해, 소중한 젊은이들이 끝없이 전장으로 내몰렸다.

그리고, 나 또한 이런 비참한 운명을 피해갈 순 없었다.


-----------------------------(12년 후)


"그래서, 뭘 하시겠다고요?"


"들었잖아. 목수가 되어서 집을 지을 거라고."


"하! 항상 밤마다 피칠갑이 되어서 돌아오는 양반이 이런 말을 하니까, 내 기가 다 찹니다 그려!"


"이제 전쟁도 끝났으니까 악귀들 대신, 나무라도 좀 썰어보려고 한다 왜."


"크큭... 그럼 그렇지. 역시 우리 대장은 뭐라도 썰고 있어야 심신이 안정되... 아, 거 때리지 좀 마십쇼!"


"많이 보고싶을 거다 이놈들아. 이젠 대장 말고, 형님이라고 불러."


"하하~ 대ㅈ... 아니, 형님은 무슨 일이든 잘 해낼거요. 여태까지 우리들을 잘 이끌어 왔듯이 말이오."


"그래 고맙다. 너희들도 나중에 우리 동네로 한번 놀러 와라. 같이 코가 비뚤어질 때까지 마셔보자고."


"꼭 놀러 갈게요 형님. 그 때까지 몸 건강하시고요."


"너희들도 잘 정착해서, 원하던 행복을 찾기를 바란다."


나는 동생 같은 부하들을 뒤로 하고 길을 떠났다. 제국군 장교로서 무사히 전역한 나는,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고향으로 향하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말이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감도 안 잡히는군."


20살이 되자마자 강제로 징집 당해서 전쟁터로 끌려갔기에 나에게 젊은 시절의 청춘 같은 건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나날을 보낼 뿐, 언제 죽을지도 모를 상황에서 미래의 꿈 같은 걸 그리고 있을 여유 따윈 없었다.


"뭐, 지금이라도 제대로 살아가면 되겠지."


전장에서 크고 작은 공들을 많이 세운 나는, 상급 장교까지 승진했고 전역 후 여태까지 모아둔 봉급과 퇴직금을 포함해서 꽤나 두둑하게 한몫 챙겨 나올 수 있었다. 나는 묵직한 금화 주머니들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이 정도 돈이라면 어디에서도 정착하기는 쉬울 터.


"정말 지옥 같은 나날이었어. 아직도 그 곳에서 살아서 나온 게 믿기지가 않네..."


징집 되고 채 5년이 되기 전에, 나를 제외한 모든 동기들이 전사했다. 그리고 10년이 지나자, 같은 고향 출신 생존자는 나를 포함해서 딱 3명 뿐이었다.


"이보쇼 군인양반. 아무래도 에버츠까진 적어도 사흘은 더 걸릴 거 같은데, 오늘은 이 주변에서 묵었다 가는 게 어떻겠소?"


악몽같은 기억들을 떠올리고 있을 때, 마부가 고삐를 당기며 말했다.


"그럼, 적당한 마을에 세워주시죠."


"흠... 이런 전쟁통 속에 멀쩡한 곳이 남아 있을진 모르겠지만, 한번 찾아보겠소."


마부는 한참을 돌아다니고 나서야, 길목에 말을 세웠다.


"그나마 이 곳이 괜찮아 보이는군. 오늘은 이 주변에서 묵고, 아침에 다시 만납시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내일 다시 뵙죠."


나는 마부와 헤어지고 오늘하루 동안 묵을 여관을 찾아 나섰다.


"흑... 흑... 내 아들이... 내 착하고 자랑스러운 아들이..."


"이보게, 이만 들어가세. 그런다고 우리 죽은 아들들이 살아서 돌아오겠나..."


징집 된 자식의 전사 소식을 듣고 흐느끼는 부모.


"부인~ 오늘 갓 나온 따뜻한 빵입니다. 제가 특별히 많이 넣어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하지만, 한 개면 충분해요. 이제는..."


"이, 이런! 제가 실례를... 죄송합니다...!"


피난 중에 남편을 잃은 과부.


"이 녀석들, 줄 좀 똑바로 서지 못해? 아예 안주는 수가 있어!"


마을이 침략 당해서 단번에 고아가 되어버린 아이들.


"여기도 사정은 똑같군."


이제는 익숙해진 광경 속에, 나는 혼자 중얼거리며 여관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한참을 돌아다녀도, 멀쩡한 건물이 별로 없었기에 방 하나 구하는 것도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러다가 오늘 밤은 길바닥에서 자야겠... 응?"


허탈한 심정으로 주변을 살펴보던 도중, 어두운 골목길 사이에서 반짝이는 빛이 보였다.


(뭐지? 저 은빛은... 고양이...?)


호기심에 나는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멀리서부터 보이는 은은한 빛은 가까이 다가갈 수록,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이건...)


몇 걸음 더 걸어가고 나서야, 나는 빛의 정체를 확인 할 수 있었다. 길 구석엔 은빛 머리카락의 꾀죄죄한 여자아이 하나가 멍하니 앉아있었다.


(이 아이도 고아인가...)


나는 코 앞 거리까지 다가갔지만, 그녀는 내가 투명인간인 것처럼 의식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가족들을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터. 그래서 아직도 충격에 빠져있는 거겠지...)


여기저기 때가 묻은 지저분한 얼굴, 윤기를 거의 잃어버린 은빛 머릿결, 창백한 피부에 13살 정도 되어 보이는 깡마른 몸, 부르튼 입술에 초점을 완전히 잃어버린 죽은 눈... 나는 그녀의 처참한 몰골에 할 말도 잃은 채, 한참을 멍하니 지켜봤다.


(얼마나 오랫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거지... 보아하니, 잠도 제대로 못 잔 거 같은데)


.................


(삶의 의욕을 완전히 상실했군. 다른 고아들처럼 배식조차 받지 않는 걸 보니)


.................


(누군가 손을 쓰지 않으면, 곧 기력이 다 해서 쓰러지겠군...)


가슴 속 깊이 안쓰러움을 느낀 나는, 천천히 무릎을 굽혀서 소녀를 바라보았다.


"꼬마야, 안녕?"


.................


그녀는 내 인사에도 입을 다문 채, 공허한 눈으로 땅바닥만 내려보고 있었다. 마치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거처럼.


.................


"일단, 같이 일어서 볼까? 여긴 너무 춥고 어두우니까."


.................


"걱정마렴. 아저씨는 절대 나쁜 사람이 아니야. 네가 원한다면 더 이상 방해하지 않을게."


.................


그녀는 여전히 죽은 인형처럼 아무런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고민하고 있던 찰나,

나도 모르게 그녀의 축 처진 손에 눈길이 갔고, 나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살펴보았다.


(세상에... 바람만 불어도 부러질 거 같군)


.................


(마치, 얼음장처럼 차가워... 여기에 모닥불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


(너무 가여워... 얼마나 충격이 컸으면, 자기 스스로도 돌보지 못할까...)


내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매만지고 있을 때, 갑자기 눈 위로 시선이 느껴졌다.


.................


(어, 언제부터 날 쳐다보고 있었지...?)


.................


(갑자기 이래서야 애가 놀랐을지도 모르겠어)


아이는 공허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괜히 미안해진 나는 당황하며 그녀의 손을 살포시 내려 놓았다.


"미안하구나. 손이 너무 차가워 보여서 나도 모르게 그만..."


.................


"아저씨가 갑자기 다가와서 놀랐지? 사과의 의미로, 식사라도 대접해주고 싶은데."


.................


"방금 만져보니까 손이 너무 차갑더구나. 일단 같이 따뜻한 곳으로 가자."


.................


나는 천천히, 그리고 너무 강압적이지 않게 그녀의 손을 잡고 일으켜주었다.


.................


"가자."


의외로 그녀는 순순히 내 손을 잡고 따라왔다. 

내 체온으로 그녀의 차가운 손이 점점 따뜻해지는 걸 느끼며, 한 한적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조용하고 따뜻한 자리 하나만 내주세요."


"네, 이쪽으로."


종업원의 안내를 받으며 우리는 벽난로가 있는 구석 자리에 앉았다.

나는 일부러 난로 쪽에 그녀를 앉히고 음식을 주문했다.


"감자 수프 두 접시랑 빵 세 덩어리, 계란이랑 소시지도 가득 담아 주시죠."


"네 손님. 마실 거는 어떻게 해드릴까요?"


"나는 맥주, 앞에 아이는 꿀을 탄 우유 한잔이면 되겠군."


"알겠습니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는 동안, 나는 팔짱을 낀 채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눈 앞에 소녀를 다시 살펴봤다.


서늘한 달빛 같은 은색 머리카락, 푸른 호수처럼 깊고 차분한 눈빛, 백옥보다 더 하얀 피부결, 살짝 여우처럼 올라간 눈꼬리와 앵두와 같은 입술... 초췌한 몰골에 허름한 옷차림만 아니었다면, 누가봐도 귀족가의 영애처럼 보이는 소녀였다.


(그러고 보니, 귀족들은 서로 재산을 노리는 사촌들이 많다고 들었는데...)


.................


(설마 이 아이도 그런 상황을 겪은 건 아닐까?)


.................


(아니야, 주제 넘는 생각은 하지 말자. 난 이 아이가 어떤 사연이 있는지도 전혀 모르니까...)


나는 가볍게 숨을 들이키며 입을 열었다.


"난 알버트 윈델이란다. 10년 넘게 군대에 있다가,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지."


.................


"넌 이름이 뭐니?"


.................


"그래, 나중에 말하고 싶을 때 알려줘도 되니까 부담 갖지마렴."


어색한 공기가 감돌고 있을 때, 곧 머지않아 주문한 음식들이 나왔다.


"식사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감사합니다."


.................


여자 종업원은 나와 아이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혹시, 선생님의 따님인가요?"


"아닙니다."


"그러면...?"


"그냥... 제가 돌봐주고 싶어서 데려왔습니다."


"어머~ 너무 자상하시네요. 요즘 이런 아이들이 거리에 많이 돌아다니긴 하죠."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맞아요. 저희 조카들도 몇 년 전부터 제가 거두어서 키우고 있는데... 아, 제가 너무 눈치가 없었네요. 식사 맛있게 하세요!"


쾌활한 종업원이 음식을 놓고 자리를 떠나자, 다시 어색한 침묵이 감돌기 시작했다.


"자, 어서 먹으렴. 아저씨는 하루종일 돌아 다녔더니, 너무 배고픈걸."


.................


"흠..."


어색한 분위기도 환기 시킬 겸. 나는 먼저 숟가락을 들어 수프를 한 모금 들이켰다.


"음~ 역시 맛있네. 사실 감자 수프는 어떤 식당에서도 거의 실패하는 경우가 없거든."


.................


"오히려 맛이 없으면, 그것대로 입소문이 날 정도니까. 맛있으니까 어서 먹어봐."


.................


내 권유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물끄러미 그릇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이를 어쩐다...)


어떻게 해서든 아이에게 음식을 먹이고 싶은 나는, 의자를 끌어서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뭐라도 먹어야 기운을 차리지. 아저씨 말 믿고 한번만 먹어볼래?"


.................


나는 조심스럽게 수프를 한 숟가락 떠서 후후 분 다음, 그녀의 입가로 가져갔다.


"자, 아~ 해보렴."


.................


그녀는 눈 앞에 놓인 숟가락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천천히 작은 입을 열었다.


"옳지."


나는 조심스럽게 한 숟가락 씩 그녀에게 수프를 먹였고, 다행히 소녀는 입 안에 음식을 머금고 천천히 들이키기 시작했다.


"어때? 맛있지?"


.... 끄덕 ....


(드디어, 소통이란 걸 해보는구나)


미세한 반응일 뿐이었지만, 그녀의 첫 의사 표현에 나는 감격스러웠다.


"다른 것도 같이 먹어볼까? 자, 아~"


우물... 우물...


13살은 족히 먹은 아이한테 직접 떠먹여주는 모양새가 꽤나 이상했지만, 나는 그녀가 먹어주는 것만으로도 너무 고마울 따름이었다.


"역시, 배가 많이 고팠구나. 부족하면 더 시켜줄테니까 마음껏 먹으렴."


우물... 우물...


나는 아이와 천천히 식사를 마치고, 그녀에게 입힐 옷을 사기 위해 가게로 향했다.


"이런 추운 날씨에 그런 걸 입고 다니면 안돼. 아저씨랑 같이 골라보자."


.................


여전히 말 없이 걷고 있는 그녀였지만 아까와 다른 점이라면, 처음보다 내 손을 좀 더 강하게 잡고 있단 사실이었다.


"원하는 게 있으면 골라봐."


옷 가게 안으로 들어간 나는, 나무 마네킹을 가리켰다.


두리번 두리번


(흠... 뭔가 마음에 드는 걸 찾았나?)


의외로 적극적인 그녀의 모습에, 나는 알 수 없는 뿌듯함을 느끼며 뒤따라갔다.


.................


"이게 마음에 들어?"


.... 끄덕 ....


그녀는 허리에 푸른색 리본이 달린 흰색 원피스 앞에 우뚝 섰다. 지금 입기엔 많이 춥겠지만, 실내라면 괜찮을 거 같았다.


"그러면, 이거 말고도 다른 것도 골라보자. 밖에서 입고 돌아다니기엔 너무 얇으니까."


.................


"지금 당장 입고 싶다고?"


.................


"알겠어. 그래도 밖에 나갈 때는 더 따뜻하게 입어야 한다?"


.... 끄덕 ....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했다던가. 나는 묘한 감정을 느끼며 그녀를 따라서 잠옷, 외투, 속옷 등을 더 담아왔다.


"금화 1개, 은화 22개입니다."


"여깄소."


옷을 잔뜩 산 우리는, 다시 여관을 찾아 나섰다.

아까보다 표정이 조금 더 부드러워진 그녀는, 새 옷이 마음에 들기라도 한 듯 계속 고개를 내려 자신의 모습을 쳐다봤다.


"큭큭..."


.........?


"아니, 그냥..."


.........?


깨끗하고 예쁜 옷차림과는 대비되는, 꾀죄죄한 그녀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뭔가... 옷만 멀쩡한 게 좀 웃겨 가지고."


(꾸깆...)


"윽...!"


내 손을 움켜 잡은 그녀가 살짝 나를 꼬집은 게 느껴졌다.

아직 그녀에게 이런 감정이라도 남아 있는 게 정말 다행이었다.


"아무래도 이 곳 주변엔 여기밖에 없는 거 같네. 들어가자."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카운터 쪽으로 걸어갔다.


"하룻밤에 은화 10개요. 비싸면 다른 곳으로 가시든지."


"괜찮소. 여기 방 하나 내주시오."


전쟁 때문에 인프라가 많이 사라진 지금, 숙박비 역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밤 그녀를 재울 곳이 생겼단 사실에 나는 기뻤다.


"308호라... 여기군."


나는 열쇠로 방문을 열었다. 


"나쁘진 않네 그치?


.................


깔끔한 방 안엔 침대 두 개와 식탁과 의자, 목욕탕도 따로 있었다. 그리고 구석엔 오븐과 간단한 조리 기구들도 구비되어 있었다.

하루 밤 동안 지내기엔 차고 넘치는 수준이었다.


"일단 먼저 씻자. 수건이랑 옷은 여기 있으니까, 같이 들고 들어가."


.................


"왜 그러니?"


.................


(설마...)


나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안돼. 넌 다 큰 여자애잖아. 이런 아저씨가 네 몸까지 씻겨줄 수는 없어."


.................


"하아..."


나는 한사코 거절했지만, 그녀는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 보고 있을 뿐이었다.


.................


(그래, 지금은 내가 이 아이의 보호자잖아?)


.................


(아빠가 딸을 씻겨주는 게 그렇게 이상한 건 아니니까...)


.................


결국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알았어. 하지만 머리랑 등만 씻겨 줄 거니까, 몸 앞 쪽은 네가 직접 씻으렴. 알겠지?"


끄덕... 끄덕...


"그럼, 먼저 욕조 안에 들어가 있어. 따뜻한 물을 받아 줄게."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앞에서 옷을 스르륵 벗으며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나를 의지해주는 건 고맙지만, 이 애는 부끄러움이란 걸 모르나...?)


나는 윗도리만 벗고 그녀를 씻기기 위해 따라 들어갔다.


콸콸콸


"어때? 너무 뜨겁거나 차갑진 않아?"


끄덕....


"일단 더운 물에 몸 좀 담그고 있어봐. 아저씨는 비누랑 수세미를 가져올게."


나는 그녀가 욕조 안에서 몸을 풀고 있는 동안, 부드러운 양털 수세미에 비누를 묻혀 거품을 만들었다.


(오늘 하루 사이에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고향에 돌아가기 전에 멋대로 입양부터 하다니. 내가 이렇게 충동적인 사람인 줄은 몰랐네)


오늘 일어난 상황 자체가 아직도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오랫동안 문지르자, 손 안엔 거품이 충분히 생겼고 나는 고개를 돌려 욕조 쪽을 바라봤다.


"헉?!"


.................


그녀는 언제 욕조 안에서 나왔는지, 벌써 젖은 알몸으로 내 앞에 서 있었다.

마치 씻겨주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몸은 충분히 적신 거 같네. 이제 뒤돌아서 여기 앉아볼래?"


나는 그녀를 목욕 의자에 앉히고 바가지에 물을 퍼서 조심스럽게 머리 위에 끼얹었다.


(이런 고운 머릿결에서도 구정물이 이렇게 많이 나올 수가 있구나...)


나는 속으로 감탄하며 그녀의 머리를 수세미로 부드럽게 닦아줬다.


"꽤 오랫동안 밖에 있었나 보네. 앞으론 꼬박꼬박 잘 먹고, 잘 씻어야 한다?"


.................


"이제 등을 씻겨 줄게."


다시 바가지에 물을 퍼서 그녀의 등 위에 끼얹은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 큰 흉터는 도대체 뭐지...?)


그녀의 등 뒤에는 머리카락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던 큰 흉터가 나있었다.

평생을 전쟁터에서 구른 베테랑 군인인 나에겐 굉장히 익숙한 상흔이었다.


(이건 분명히 검으로 낸 상처야. 도대체 누가 이런 어린아이를 밴 거지...?)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흉터를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얼마나 아팠을까. 제대로 처치만 했어도, 이렇게 흉이 크게 나진 않았을텐데...)


내가 씻기는 걸 멈추자,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나를 멀뚱멀뚱 쳐다봤다.


.........?


"미, 미안. 등 뒤에 이렇게 큰 상처가 있는 줄 몰랐네. 많이 아팠겠구나."


.................


"마저 씻겨줄게. 다시 뒤돌아서..."


스윽...


그녀의 시선이 갑자기 내 가슴 쪽을 향하더니, 이내 손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6년 전, 화살에 맞은 자국이었다.


"아, 이거...?"


.................


"이건 아저씨가 화살에 맞은 자국이야. 그래도 그 땐 어쩔 수가 없었어."


.........?


"내가 피했으면, 뒤에 있는 동기의 머리에 꽂혔을테니까. 이 정도면 싸게 먹힌거지."


.................


"물론, 그 녀석은 결국 내 곁을 떠났지만..."


.................


대화의 내용이 급 우울해지자, 나는 다시 화재를 전환했다.


"하하... 그래도 이런 아저씨 몸에 난 상처랑 가녀린 네 몸에 난 걸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어. 아마 네가 나보다 훨씬 아팠겠지."


.................


"자, 거의 다 끝났으니까 뒤 돌아봐. 아저씨가 마저 씻겨줄게."


나는 그녀의 머리와 등을 다 씻겨주고 나서, 목욕탕 문을 열고 나왔다.

침대 위에 드러누워 잠시 기다리고 있자, 곧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끼이익...


"다 씻었니?"


끄덕...


아직 젖어있는 머리를 한쪽으로 젖힌 그녀는 말끔하게 가운까지 입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초라했던 소녀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고, 마치 동화 속 공주님 같은 아이가 내 눈 앞에 서 있었다.


"이야... 이렇게 깨끗하게 씻으니까, 전혀 못 알아보겠는데?"


.................


"이젠 아저씨도 좀 씻자. 피곤하면 먼저 자고 있으렴."


.................


나는 바가지를 몸 위에 끼얹으며 생각했다.


(저 아이...)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지금까지 받아 온 상처를 전부 지워줄 수는 없겠지)


(그래도...)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책임지고 행복한 아이로 만들어주겠어!)


나는 두 눈을 감고 주먹을 꽉 쥐었다.


끼이익...


(먼저 잠들었군. 역시 피곤했겠지) 


씻고 밖으로 나오자, 침대 위에는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감기 들라..."


나는 그녀가 깨지 않게 조심히 이불을 덮어주고, 눈가를 간지럽히는 머리카락을 옆으로 쓸어주었다.


"잘 자렴."


나 역시 하루 종일 밖에서 돌아만 다녔던 탓에, 발 밑에서부터 천천히 피로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하암~ 전역하고 내가 원할 때 잘 수 있는 건 참 좋네..."


나는 이불을 덮고 옆으로 몸을 기울였다.


.....................................

..............................

.......................

..................

............


(왠 향기가...)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코 끝에서부터 느껴지는 향긋한 냄새에,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


(어, 언제부터 여기 안에 있었던 거야...?)


소녀는 내 이불 안에서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밤 하늘의 달빛에 비친 그녀의 머리카락은 은은한 빛을 내고 있었고, 생기를 되찾은 예쁜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추워서 들어왔니...? 그럼 아저씨가 더 두꺼운 이불로..."


"레아."


"어? 어?"


처음으로 목소리를 내서 말한, 그녀 자신의 이름. 앳된 얼굴답지 않게 제법 성숙한 목소리였다.


"내 이름."


"아..."


그녀는 그렇게 자기 할 말만 끝마치고, 다시 내 품 안에서 눈을 감았다.


(그래, 그게 네 이름이구나...)


.................


"잘 자렴, 레아."




닉변했음. 

시른대요 --> 뒤틀리다


5편 이내로 끝내는 걸 목표로 하는 중

얀끼력은 점점 심해지는 구조로 쓸 예정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