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는 계절이 돌아왔다.

건기와 우기가 명확하게 구분되는 곳은 아니지만 

이 시기만 되면 사흘 밤낮으로 비가 오는 날씨가 

지속된다.

 이게 참 골때리는 문제다.

한 시점에 많이 오는 것이 아니니까 

뭘 하기는 애매한데

뭔가를 하지 않으면 위험하다.

 "형,배수로 어디까지 팠어?"

 "거의 다 했어.여기만 좀 더 파면 끝이야."

 체력이 심각할 정도로 줄어있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도 쉬면서 조금씩 줄어들은 것 같다.

힘들기는 했지만 지쳐서 쓰러질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면 참호를 파면서 생긴 노하우가 

도움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

 "다 끝났어.자루만 좀 쌓아서 

안 흘러내리게 하면 끝이야."

 "그럼 애들 불러서 시킬테니까 조금 쉬고 있어."

 "그래.좀 쉬어야지."

 돗자리를 깔아놓은 곳에 누워서 

선선한 바람으로 땀을 식혔다.

"케니,혼자서 저만큼 판거야?"

 "저 정도는 혼자 할 수 있는거니까."

 "이것이 젊음인가?"

 "그거 나한테 한대 얻어맞았던 

빨간색 좋아하던 대위가 했던 말인데."

 제이드는 밀짚모자를 쓰고서 

내가 있는 밭까지 찾아왔다.

집에서 꽤 먼 거리인데 찾아온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거다.

 "군에서 보낸 우편에서 너한테 참전군인 행사 

나와달라던데?"

 "안 갈거야.좋은 자리도 아니고."

 안 봐도 뻔한 일이다.고작 '유감'이라는 단어 따위로

우리의 인생을 정리할 생각이겠지.

그런 말로 위로 받을 수 있는게 아닌데 말이다.

 "너 훈장도 받는다는데?"

 "그딴거 우편으로 보내라고 해."

 훈장을 받아 마땅했던 사람들은 

전부 참호에서 나오지 못했으니까.

용감했고 똑똑했던 중대장은 

저격수에서 머리가 뚫렸고

착하고 성실했던 소대장은

포탄에 맞아서 시체도 못 남겼다.

기관총의 총탄은 후임,동기,선임 안 가리고

모두를 공평하게 죽였다.

뒤에서 뒷짐지고 지시나 하던 사람들이

무슨 자격으로 훈장을 준다는 것인가?

"알았어.화내지 마."

 "미안......"

 나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이번 담배는 흙탕물 맛이었다.



 "캐롤라인 중위,참석률은 어떤가?"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참석한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렇군.행사 준비에 전력을 기울이라고 말해두게.

우리가 죽은 사람들을 잊지 않는다고 보여줘야하니."

"네.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손가락으로 의자 팔걸이를 두드리던 장교는

한숨을 쉬었다.

 "내 얼굴을 때렸던 그 녀석은 잘 살아있으려나?"


 "케니,케니!"

 "왜 그렇게 애타게 불러?"

 "너한테 손님이 왔어."

 무슨 손님이 이런 꼭두새벽부터 찾아오는지 

참 매너가 없다고 생각을 하면서 대충 옷을 입고 

현관으로 나갔다.

 "오랜만일세.케니 루드윅 병장."

 "오랜만입니다,칼슨 대위님."

 "이젠 준장이라네."

 고속승진을 한 신임 중대장이 나를 찾아왔다.

병사들에게 사기진작이랍시고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다가 나한테 맞았던 사람이다.

 "자네를 보면 아직도 뺨이 아프군."

 "흉터는 안 남으셨군요."

 "크하하,흉터가 남았다면 중장까지는 달았겠지."

 능구렁이 같은 사람이다.

별로 좋아하는 인간상은 아니다.

"이번 행사에 불참선언을 했다고 들었는데

부탁이니 꼭 참석해주게."

 "군과는 좋은 추억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평생 그 기억을 지우고 살 수는 없잖나."

 두통이 몰려왔다.

스트레스 때문인가?

"제 입에서 존대가 나올때 나가십쇼."

 "못 나가겠네.오랜만에 한대 맞아보는 것도 괜찮겠지."

 나는 준장의 멱살을 잡았다.

 "왜 찾아와서 제게 ×같은 기억을

 되짚게 만드십니까?"

 "그게 그때 죽어간 녀석들을 위한 일이니까."

 준장은 내 손을 뿌리치고 역으로 멱살을 잡았다.

 "우리가 위로하고 기억하지 않으면

도대체 어떤 인간이 그럴 수 있지?

대답해봐!병장!그때처럼 속 시원하게!"

 40대에 접어든 장교의 희끗희끗한 머리와는 다르게

그의 기세는 갓 중대장으로 배치받은 시절 그대로였다.

 "그럼 하나만 약속해주십쇼."

 "말해봐."

 그는 내 멱살을 놓아주었다.

 "그 녀석들 위령비에 술 한병만 뿌리게 해주십쇼."

 "무슨 술로?"

 "그건 제가 가져가겠습니다.그냥 그렇게만 해주십쇼."

 "알겠네.그럼 행사 때 보지."

 준장은 그렇게 돌아갔다.

 "형,끝났어?"

 "대충은."

 한숨을 푹 쉬고서 한구석에 처박아두었던 

군복을 꺼내보았다.

닳고 닳은 군복.

이걸 다시 꺼내야하나?

 "정장으로 입어야겠네."

 나는 군복을 다시 구석에 넣어두고서 시내로

나갈 준비를 했다.

가기 싫지만 그래도 술 한잔 주는 정도는 괜찮겠지.

 그렇게 지갑을 챙기고 시내로 가는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케~니."

 누나가 나를 뒤에서 와락 안았다.

 "이 누님한테 비밀로 하고 시내로 가는거야?"

 "이래서 그냥 혼자 조용히 갔다 오려고 한건데."

 "누나 섭섭해."

 "남정내 옷 사러가는거 구경하러 갈거면

따라오던지."

 "......버스시간까지 얼마나 남았어?"

 "대충 20분 정도 남았어."

 누나는 엄청난 속도로 뛰어가서 옷을 갈아입고 왔다.

 "정찰병 애들도 저정도는 아니었을텐데."

 한숨을 푹 쉬고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은 쨍쨍한 날씨였다.

 "비가 오려나."

 바닥을 보니 공주개미가 보였다.

 "우산 챙기길 잘했네."

 예전에 참호에서 굴러다닐때 동기가 가르쳐주었다.

공주개미가 기어나온다면 비가 올 때라고.

 "어때?"

 누나는 굉장히 힘을 준 듯한 복장을 입었다.

흰 원피스에 여름에 어울리는

얇게 만들어진 챙이 큰 모자

 ".....예쁘네."

 무의식중에 생각한 그대로 말해버렸다.

 "진짜?신경 많이 썼는데 다행이다."

 기쁜듯이 웃으면서 내 왼팔을 꽉 안고 놓지 않았다.

 "누나,버스왔어."

 "이대로 타자."

 "밀치고 간다."

 "그럼 안 되지."

 재빠르게 떨어진 누나와 함께 버스에 올랐다.

시내에 도착하자 누나는 굉장히 들뜬 모습으로 

내 팔을 잡아당겼다.

 "조금이라도 놀려면 빨리 움직여야지."

 "그렇게 급할 필요 있나?"

 나는 한숨을 쉬고서 누나가 

원하는데로 끌려가주었다.

 정장집에서 엄청난 속도로 옷을 주문한 뒤에

분수대 광장 쪽으로 끌려왔다.

 "누나,왜 그렇게 신나있어?"

"제이드 빼고 둘이서 놀러온거 처음이잖아."

 생각해보니 그렇다.

누나와 단 둘이서 놀러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분명히 꼬마였던거 같은데."

 "너무 날 애로 보는거 아냐?"

 "아직도 꼬맹이 같은데."

 그렇게 거리를 걸으면서 

군것질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케니,저거 봐봐."

 딴청을 피우면서 길을 건너던 누나에게 

차량이 달려왔다.

나는 바로 누나를 내 쪽으로 강하게 당겼다.

차는 아슬아슬하게 누나를 빗겨갔다.

 "......엄마야."

 "잘 좀 보고 다녀."

 놀랐는지 내 품에서 벗어날 생각을 안하는

누나를 떼어놓고서 다시 길을 걸었다.

 "듬직한데?"

 "매번 도와줄 수 없으니까 조심해."

 나는 강변의 산책로 벤치에 앉아서 담배를 물었다.

조금은 지치는 하루다.

 "담배 안 끊을거야?"

 "글쌔,아직은 생각 없어."

 세상은 조금 혼란스럽지만 평화롭게 흘러가고 있다.

조금은 마음이 편하기는 하다.

제이드와 상담을 한 것이 도움이 된 모양이다.

 "그래도 조금씩 줄이고는 있어."

 악몽을 꾸는 빈도도 줄어들고 있다.

잠을 깊게 자는 날도 늘어나고 있다.

 "이번에는 저기 한번 가보자."

 "그래."

 생각해보면 어릴때부터 

누나가 먼저 나서서 하고 싶다고

했던 적이 없었다.

오늘만큼은 누나에게 맞춰줘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맛있다!"

 노점상에서 파는 음식도 먹어보고

거리도 걸으면서 누나가 가는데로 따라갔다.

 "재밌었다."

 어느새 하늘이 점점 어두워졌다.

 "어?비온다."

 나는 미리 챙겨둔 우산을 펼쳤다.

 "오늘 비 오는거 어떻게 알았어?

라디오에서도 오늘 맑을거라고 했는데."

 "그냥 감으로 알았어."

 날도 어두워졌고 비도 오고 있었다.

버스는 비 오는 날 야간은 운행하지 않는다.

 "자고 가야겠네."

 일단은 누나를 우산 안으로 끌어당긴 다음

걸음을 맞추면서 여관으로 갔다.

 "분명 여기쯤이었을텐데."

 "뭔가 잘못 찾아온 것 같은데?"

 분명히 내가 기억하기로는 이곳이 여관이었다.

 "뭔가 퇴폐업소 같은 느낌인데."

 업소명은 그대로였지만 분위기가 딴판이었다.

그래도 일단 비를 피하기 위해 들어가기로 했다.

 "어서오세요."

 무성의한 목소리로 반겨주는 점원에게

방을 하나 달라고 했다.

 "303호실입니다."

 나는 누나와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

 "쫄딱 젖었네."

 둘이서 한 우산을 쓰려다보니 내 왼쪽 어깨 쪽은

많이 젖어있었다.

 "먼저 씻을래?"

 "그러는 누나는 추워서 벌벌 떨고 있으면서."

 나는 누나를 먼저 욕실로 보내고서 외투를 벗었다.

오래된 외투지만 그래도 

나름의 애착이 있는 물건이다.

외투치고는 많이 무거운 물건이지만

군복보다야 낫다.

 "......안에서 입고 나오지?"

 "왜?굳이?"

 누나는 씻고 나오면서 

수건 한장만 대충 걸치고 나왔다.

다 큰 사람이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왜?꼴렸어?"

 "그거 이전에 사회 통념으로 아웃이야."

 "칫,재미없어."

누나는 볼을 부풀리면서 삐졌다.

누가 봐도 삐진 티를 팍팍 내는 그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지만 그래도 챙겨줘야한다.

그래도 누나는 내 제정신을 유지하게 해주는

큰 기둥 중 하나다.

 "씻고 올게."

 나는 욕실로 들어가서 옷을 벗었다.

흉터로 뒤덮힌 상반신을 볼때마다 쓰라리긴 하지만

그래도 뭐 살아있으니 쓰린거 아니겠는가?

다 씻고서 수염을 정리했다.

최근에 면도를 안 해서 조금 지저분했다.

 "좀 낫군."

 면도도 처음 할때는 많이 베였는데 지금은 능숙하다.

물론 참호에서는 면도를 못했다.

거울은 커녕 물도 모자란데 무슨 면도란 말인가?

"누나가 침대에서 자."

 "침대 넓은데 굳이 떨어져서 잘려고?"

 "굳이 같은 침대를 쓸 필요 없긴 해."

 "나랑 결혼하면 매일 같은 침대에서 잘건데

지금부터 익숙해져야지."

 "난 결혼 생각 없다니까 그러네."

 누나는 나를 꽉 끌어안았다.

 "난 설득할 머리도 생각도 없으니까."

 그러고는 어디서 배웠는지 모를 기술로

나를 침대로 넘어뜨렸다.

 "강제로 확답을 받아내야겠어."

 "굳이 이럴 필요 없을텐데."

 나는 누나를 밀어내려했다.

누나를 아내로 맞이하는건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다.

 "좀 받아주면 안 되는거야?

제이드랑은 그렇게 만나면서 나는 왜 뒷전이야?"

 누나는 울면서 내 몸을 눌렀다.

저항을 해봤지만 누나의 근력이 굉장히 강했다.

 "나무꾼 딸래미라서 너보다 강하거든?

그러니까 법칙대로 하자고.

약육강식으로 가자고."

 눈이 돌아버렸다.

초점이 없는건 둘째치고 평소의 누나와는 다른

무언가가 나온 것 같았다.

 "이건 수습 불가능인데."